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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의 그림자

2부(진짜이민)

by 김미현


대학도시라 불리는 곳.

수많은 인종이 섞여 산다.

열린 마음과 관용의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그런 도시에서,

장차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똑똑한 아이들이 모이는 김나지움(Gymnasium, 독일의 상급 중·고등학교)에서,

내 아들이 정기적으로,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을 겪게 되리라고는—

나도, 하물며 독일사람인 K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낯 뜨겁고, 추악한 진실이었다.




교내에서도, 하굣길에서도 차별은 툭툭 튀어나왔다.


눈 찢기.

비웃음.

“니하오.”


나는 말했다.

“그냥 무시해.”


아들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세상을 모른다는 듯, 원망스러운 눈빛을 흘리며.


“무시하면 더 심해져.”


K는 눈 찢기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했다.


“그건 인종차별이야. 절대 용납될 수 없어. “

(우리는 늘 영어로 대화했지만, 여기서는 한국어로 옮긴다.)


하지만 “니하오”에 대해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혹시 그냥 인사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걸 수도 있잖아. “


나는 그 말이 못내 걸렸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 옹호하는 건가?’

사실 내 말(그냥 무시해)과 맥락은 다르지 않았는데, 왜 K의 말은 꼬아 들리던 걸까.




학교에서 한 학년 위 남학생이 아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너는 아시안 여자 애 좋아하냐?”


아들이 무시하자, 그는 결국 눈을 찢는 시늉으로 비웃었다.


그때 반 친구들이 나섰다.

“내가 걔 누군지 알아. 악질이야. 같이 가자. 사과하게 만들자.”


교실로 찾아가서 말했다.

“눈 찢는 시늉한 건 인종차별이야. 사과해.”


하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사과를 요구한 아이가 교포 3세, 여자 아이였기 때문이다.


다시 독일인 남학생이 압박했다.

“어서, 사과해.”


그제야 마지못한 사과가 나왔다.

결국 선생님께도 보고되었고,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아이들이 또 나타나 비슷한 조롱을 이어갔다.

한 번 가라앉는 듯 보였으나, 곧 또 다른 파도가 밀려왔다.

끝나지 않는 파도였다.




결정적인 사건은 하굣길에서 터졌다.

아들이 트램 역으로 향하던 대낮.


순식간에 아이들 무리가 아들을 빙 둘러쌌다.

야유와 조롱이 쏟아졌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던져 그 애들 패거리를 뚫었다.

그러면서 그 무리에게 손가락 욕까지 날렸다고 했다.


억장이 무너졌지만, 그보다 집단에게 두드려 맞기라도 할까 두려움이 먼저 엄습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문을 열자마자—

나를 보자마자—

긴장이 풀린 듯 거의 쓰러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책가방에 달려 있던 작은 열쇠가방은 사라져 있었다.

그 무리 중 누군가가 떼어간 것이었다.


아이가 진정되자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무서웠어. 근데… 가만있을 수 없었어.”




우리는 인상착의를 전해 듣고 곧장 현장으로 향했다.

열쇠가방을 떼어간 무리가 아직 근처에 있거나, 어딘가에 그것을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도 옆, 풀숲까지 헤매며 함께 발걸음을 맞췄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내 마음은 점점 집에 있는 아이로 쏠렸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풀숲이 아니라, 혼자 방에 남겨진 아이의 얼굴만 맴돌았다.


전화를 걸었다.

“괜찮아? 지금 뭐 하고 있어?”

“그냥… 방에 있어.”


잠시 후 또 물었다.

“엄마가 차려 놓은 밥 먹었어? “

“응… 엄마 언제 와?”


그 대답에 가슴이 무너졌다.

나는 K에게 말했다.


“우리 그냥 집에 가면 안 돼? 애가 혼자 있잖아. “


K는 고개를 저었다.

“We need evidence.”

(증거를 찾아야 해.)


그 순간, 나는 이성을 잃었다.

그동안 내 안을 짓눌렀던 모든 감정들이 폭발해 버렸다.




“K. 나는 애가 먼저야.

열쇠고리, 가방… 그 딴 게 뭐가 중요한데?

애가 받은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애가 집에 혼자 있는데 계속 찾겠다고?

나는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어.

학교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앞으로는 네 말 안 들어. 상의도 안 해!


이 놈의 독일, 독일 것들 다 지겨워.

진절머리나. 역겹다고!

이렇게 인종 차별이 심할 줄 알았으면 절대

안 왔어. 안 왔다고! “




K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곧 소리를 질렀다.


“Why are you yelling at me?

What did I do wrong?

(너 왜 나한테 그러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애를 차별했어? 나도 할 만큼 하고 있는데.

근데 왜!

너는 맨날!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그거 없이는 아무것도 안 바뀌어.

아무것도!

왜 너까지 나를 힘들게 하는 건데? 왜! “




어둑해진 거리를, 우리는 끝내 함께 걷지 못했다.

같은 아이를 지켜야 했지만,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낯선 존재였다.


그리고 어두운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종차별 #이민가정 #엄마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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