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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비로소

2부(진짜이민)

by 김미현

이 글에는 불안과 상처를 다루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읽는 분의 마음을 살피며 적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학교 측에

면담을 요청했다.

숨기지 않기로 했다. 아들이 원했다.


교무회의실 문을 열었다.

의자 다섯 개, 그리고 기다리는 선생님들.

학년주임선생님, 담임•부담임 선생님.

그리고 K와 나.

어른 다섯이 아들을 위해 모였다.


나는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요즘 많이 힘들어합니다.

죽고 싶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잠깐의 정적.

교사들의 눈이 커졌다.


역시 K가 맞았다.

독일의 또 다른 면이었다.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끝까지 숨기려 하는 것 말이다.


“어머님이… 직접 말씀해 주셔서 놀랐습니다.

대부분은 말하지 않으세요. 고맙습니다.”


나는 덧붙였다.


“아이의 요청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온 것도 아이의 선택이었어요.”


또 한 번의 놀람.


“부모님의 결정이 아니었군요.”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왜 세상은 늘 어른이 주도하고, 아이는 따라간다고 당연시할까.


우리는 그날, 필요한 조치를 함께 논의했다.

교실에서의 대처, 긴급연락 경로, 아이가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어떻게 손을 잡을지.

종이에 적힌 절차가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사실, 절차는 우리에게도 구명조끼였다.




며칠 뒤, 병원.

응급실과 입원실이 함께 있는 건물, 안쪽 작은 상담실.

첫 상담사가 위험 신호를 보고 연결해 준 곳이었다.


새로운 상담사는 오래 바라보고, 천천히 물었다.

한 시간이 넘게 질문이 오갔다.

속으로 나는 “약”이라도 좀 처방해 주기를 바랐다.


그때 상담사가 아이의 손끝을 가리켰다.


“말할 때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지요?

영재 아이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특징입니다.”


“네? 영재요?”


상담사는 덧붙였다.


“네. 여기서는 영재성을 시험 성적만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고방식, 감수성, 기질까지 함께 봐요. “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요동쳤다.

이게 위로일까, 또 다른 낙인일까.

‘똑똑해서 미쳐간다는 건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집에서는 긴장감이 더 짙어졌다.

K와 나는 집에 뾰족한 도구들을 모두 치워야 했다.

아들이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주방에

있던 칼과 가위를 몰래 집어 들었다.

자기 팔을 그었다.

그러고는 본인도 두려워하며 그 상처를 나에게 보여줬다.

비상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비자 때문에 억지로 어학원에 다녀야 했다.

수업 중에도 시시때때로 아들에게서 긴급 문자가 날아들었다.

그러면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미친년처럼 뛰쳐나갔다.


그러던 하루였다.

그날도 아들의 신호가 울렸다.

나는 또 뛰쳐나가려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K가 아들을 데리고 응급실로 가겠다고 했다. 평소 같았다면 그래도 내가 동행하겠다 했을 텐데, 그날은 K와 아들만 응급실에 가도록 했다.

그 순간의 나는 왜 그랬을까?

모른 척 외면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들의 상담은 또다시 이어졌지만,

반복 또 반복이었다.


아들은 상담사 앞에서는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좋아지긴, 뭐가 좋아져?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어느 날, 아이가 또 말했다.


“엄마, 죽고 싶어.”


나는 대답했다.

“그래, 도저히 힘들면…

그 선택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엄마도 곧 따라갈게.”


아들의 절망은 나를 삼켰고, 나는 그 감정에 감염된 듯 무너졌다.

정말로 그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날, 모든 게 무너진 날.

바닥을 찍었던 날.


나는 알게 되었다.

아이의 슬픈 눈을 보고 알았다.

‘아, 이 아이가 바라는 건 결코 죽음은 아니구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알았다.

‘아, 내가 너무 지쳐 있었구나.’


그날, 나는 비로소 나를 마주 보았다.


시간이 조금 흘러, 봄이 되었다.




#가족에세이 #정신건강 #삶의 전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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