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역지사지 02화

커피, 한 잔의 예(禮)로 세계를 물들이다

한 잔의 커피에 깃든 작은 의식, 세계를 이어온 역사

by 서필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에티오피아의 세레머니에서, 수피즘의 명상 의식에서,
그리고 파리 골목의 커피하우스까지...
커피 한 잔에는 삶이 숨쉬는 역사와 멋이 담겨있다.

주말 아침마다 나는 작은 의식, 예(禮)를 치른다.

케냐산 원두 상자를 열어 검게 윤기 도는 알갱이들을 손에 올린다.

손끝에 닿는 매끄러운 곡선과 단단한 질감,

그라인더를 돌릴 때 또각또각 부서지는 경쾌한 소리,

그리고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은은한 향기까지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커피, 음료에서 의례로


커피는 단순한 기호품을 넘어 ‘예(禮)’가 된다.

에티오피아에는 커피 세레머니는 손님을 맞이하는 환대의 방식이다.

방 안에 꽃과 풀을 깔고 향을 피운 뒤, 화로 위 철냄비에 생두를 볶는다.

갓 볶은 원두의 향을 손님에게 맡게 한 뒤,

제베나(Jebena)라는 토기 주전자에 커피를 끓여 작은 잔에 따른다.

한 잔의 커피를 완성하기까지 이어지는 이 모든 과정은

단순한 음용이 아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문화적 의례(儀禮)이다.

15세기 무렵, 이슬람 수피파 수도승들은 긴 명상 중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커피를 즐겼다.

신비주의 종파답게, 그들은 단순히 마시는 데 그치지 않고

커피를 하나의 명상의 의식으로 승화시켰다.

커피의 향과 카페인의 각성 효과가 어우러진 그 경험은

곧 수도승의 방을 넘어 거리로 퍼져나갔고,

학생들과 상인들, 평범한 시민들까지 커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오늘날의 카페와 닮은 공간, ‘카페하네’가 골목마다 하나둘 생겨났다.

17세기 무렵, 커피는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도착했다.

작은 원두는 베네치아와 런던, 파리를 거쳐 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 프랑스는 커피를 ‘촌사람 음료’라며 멸시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외교관 솔리만 아가가 루이 14세를 만나러 파리에 왔을 때 상황은 바뀌었다.

솔리만 아가는 설탕을 넣은 달콤한 커피와 함께

파리 시민들에게 낯설고도 우아한 예법을 펼쳐 보였다.

부드러운 향과 은밀한 손짓, 화려한 장식이 빚어낸 이국적인 풍경은

파리 사람들의 상상력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렇게 파리 곳곳에 커피하우스 문화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커피가 세상을 정복하기까지는

단순한 향과 맛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람들을 매혹시킨 건,

한 잔의 커피를 특별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의식, 예(禮)였다.

수피즘의 명상 의식에서,

파리의 커피하우스,

에티오피아의 세레머니까지

커피를 둘러싼 이 의례의 문화가 결국 커피를 세계로 이끈 것이다.


#오늘의 커피, 나의 예(禮)


커피를 내리는 동안, 나는 가끔 인스턴트로 바꿀까 고민한다.

하지만 막 갈아낸 원두 위로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순간,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향과 묵직한 바디감은

그런 생각을 단번에 지워버린다.

커피 한 잔은 내 하루를 붙드는 작은 예(禮)다.

나는 이 잔을 홀로 즐기기도 하지만,

휴일에 친구가 찾아오면 내어줄 예로 준비하기도 한다.

그 순간, 나의 작은 의례는 개인의 습관을 넘어

누군가를 위한 환대가 된다.

결국 예는 시대와 문화가 달라져도 본질은 같다.

에티오피아의 화로 옆에서도,

수피즘의 고요한 명상 속에서도,

파리 골목의 커피하우스에서도...

한 잔의 커피는 늘 사람을 이어주고 마음을 깨우는 작은 의식이었다.

아침마다 커피를 고집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작은 잔 속에서 나는 역사를 읽고, 오늘의 여백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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