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옷의 온도

by 생각의정원

옷장 깊숙한 곳에 그것이 있었다. 색이 바랜 패딩. 한때는 진한 네이비였을 것 같은데, 마지막엔 회색빛이 돌았다. 소매 끝은 해져서 솜이 조금씩 나왔고, 지퍼는 뻑뻑해서 올리고 내리기 힘들었다.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랫동안 손이 가지 않았다. 그 패딩에는 시간이 스며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샀다. 첫 알바비로. 한여름 커피숍에서 땀흘려 일하고 받은 그 돈으로 아울렛에 가서 샀다. 그때는 비싸다고 생각했다. 15만원. 지금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닌데, 그때는 며칠을 고민했다.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국 카드를 내밀 때 심장이 뛰었다.


처음 입었을 때의 기분을 기억한다. 거울 앞에서 지퍼를 올리고 내려봤다. 어깨선이 딱 맞았고, 길이도 적당했다. 무엇보다 따뜻했다. 친구들이 "새 패딩이네"라고 말해줄 때 뿌듯했다. 그 패딩을 입고 처음으로 스키장도 갔다. 그날 사진을 보면 내가 얼마나 그 패딩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다.


겨울마다 입었다. 수업 갈 때도, 도서관 갈 때도, 친구들과 놀러 갈 때도. 세탁소에 맡기는 날이면 그 패딩이 없어서 추웠다. 다른 겉옷들은 많았는데도 그 패딩만 찾았다. 왜 그랬을까. 따뜻해서? 익숙해서? 아니면 그 패딩이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줘서?


군대 가기 전에도 입었다. 마지막 휴가 때.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신 된장찌개를 먹으며 입었던 패딩이다. "군대 가면 이 패딩 못 입는다"고 말했더니 어머니가 웃으셨다. "패딩이 뭐 그리 소중하냐"고.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다. 왜 이 패딩이 소중한지.


제대하고 나서 다시 입었다. 2년 사이에 몸이 조금 달라졌다. 어깨가 더 넓어지고, 가슴둘레도 커졌다. 그래서 패딩이 조금 타이트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취업 준비할 때도 입었다. 도서관에서 밤늦게 공부하다가 집에 돌아올 때. 면접 보러 가는 날 아침, 코트 입기 전까지. 불안하고 초조할 때마다 그 패딩을 입었다. 위로가 되었다. 패딩이 나를 감싸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첫 직장에서도 가끔 입었다. 퇴근길에. 동료들은 새 패딩을 입고 왔는데, 나는 여전히 그 낡은 패딩을 입었다. "그 패딩 오래됐네"라고 누군가 말했다. 부끄러웠지만 벗지는 않았다. 벗을 수 없었다.


연애할 때도 입었다. 편한 사이가 되고 나서. 처음엔 차려입고 만났지만, 점점 편해지면서 그 패딩을 입고 나갔다. "그 패딩 맨날 입네"라고 그녀가 말했다. 싫어한다는 건지 좋아한다는 건지 알 수 없는 톤이었다. "따뜻해서"라고 대답했다. 그게 전부였나? 아니었다. 그 패딩을 입으면 나 자신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사할 때마다 고민했다. 가져갈까, 버릴까. 박스에 넣었다가 꺼냈다가 반복했다. 결국 항상 가져갔다. 새 집에서 제일 먼저 꺼내는 겉옷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유일한 익숙함이었다.


그렇게 10년을 함께 했다. 하지만 결국 버렸다. 솜이 너무 많이 빠져서 보온성도 떨어지고, 지퍼도 완전히 고장 났다. 세탁소에서도 "이제 한계"라고 했다. 그날 쓰레기봉투에 넣을 때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가 오시면 꼭 말씀하셨다. "그 패딩 언제까지 입을 거냐." "새 패딩 사줄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새 패딩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시간이 만든 익숙함. 추억이 스며든 따뜻함. 하지만 결국 그 시간도 끝이 났다.


친구들도 알았다. 내가 그 패딩을 얼마나 아끼는지. "너 그 패딩 없으면 어떻게 살지?"라고 농담했다. 농담이지만 진담이기도 했다. 정말 그 패딩 없이는 뭔가 허전할 것 같았다. 실제로 버리고 나서 그 첫 겨울은 이상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 패딩과 함께한 시간들을. 대학생 때의 설렘과 불안. 군대에서의 그리움. 취업 준비의 막막함. 첫 직장의 긴장감. 연애의 떨림. 이사의 번거로움. 모든 순간에 그 패딩이 있었다.


패딩은 단순히 추위를 막는 도구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 패딩은 그랬다. 그 패딩은 내 인생의 동반자였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함께했다.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었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떠나도 그 패딩은 여전히 내 옷장에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색이 바래도 상관없었다. 솜이 빠져도 괜찮았다. 지퍼가 뻑뻑해도 문제없었다. 중요한 건 그 패딩이 나에게 주는 안정감이었다. 따뜻함이었다. 나 자신이 되게 해주는 마법 같은 힘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정말 버려야 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거나, 위생상 문제가 생기거나. 그 날이 정말 왔다. 그리고 나는 고민하지 않고 버렸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새 패딩이 주는 신선함도 좋지만, 낡은 패딩이 주는 익숙함도 소중했다. 트렌드를 따르는 옷도 필요하지만, 시간이 만든 편안함도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10년을 그 낡은 패딩을 입었다. 겨울마다, 추운 날마다, 나 자신이 되고 싶을 때.


지금은 새 패딩을 입는다. 더 가볍고, 더 따뜻하고, 더 예쁘다. 하지만 가끔 아쉽다. 그 낡은 패딩이 주던 특별한 느낌. 시간이 만든 그 특별함을 새 패딩으로는 대체할 수 없다.


옷장을 열 때마다 그 자리가 보인다. 그 패딩이 있던 자리. 비어있는 그 공간이 말하는 것 같다. "여기 있었어. 오랫동안." 그 말이 들리는 것 같아서 나는 씁쓸하게 웃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런 패딩 한 벌과의 추억은 평생 가져가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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