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4교시가 끝나면 복도는 전쟁터가 되었다. 교실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이 계단을 두 개씩 밟으며 운동장으로 향했다. 누가 먼저 농구공을 차지하느냐가 점심시간의 승부를 좌우했다. 늦으면 축구공밖에 남지 않았고, 정말 늦으면 배구공으로 농구를 해야 했다.
우리 남중 바로 옆, 1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여중이 있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그들의 운동장. 우리가 농구를 할 때면 그쪽에서도 아이들이 나와 구경했다. 물론 우리도 슬쩍슬쩍 의식했다. 평소보다 슛이 더 강해졌고, 드리블이 더 과감해졌다. 실패하면 더 부끄러웠다.
점심시간은 30분이었다. 밥을 5분 만에 삼키고 25분을 코트에서 보냈다. 여름이면 체육복이 흠뻑 젖었고, 겨울이면 입김이 하얗게 났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농구공이 손에 닿는 그 느낌, 골대에 공이 빨려들어가는 그 순간, 동료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그 기쁨.
5교시 수학 시간, 선생님의 목소리는 귓가에 맴돌기만 했다. 머릿속은 온통 방과 후 경기 생각뿐이었다. 누가 우리 팀이고, 어떤 전술을 쓸지, 오늘은 3점슛을 몇 개나 넣을 수 있을지. 공책에는 수학 공식 대신 농구 작전이 그려져 있었다.
방과 후가 되면 진짜 시합이 시작됐다. 점심시간의 장난 같은 경기와는 달랐다. 1, 2, 3학년이 뒤섞여서 팀을 만들었다. 실력으로만 말하는 세계. 학년은 중요하지 않았다. 슛이 잘 들어가면 형이라고 불러도 됐고, 리바운드를 잘 잡으면 에이스 대접을 받았다.
기억에 남는 아이들이 있다. 키 작은 1학년 한 아이는 드리블의 신이었다. 다리 사이로, 등 뒤로, 공이 그의 손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3학년 한 형은 슛의 달인이었다. 어디서 던져도 들어갔다. 코트 한가운데서도, 3점라인 밖에서도. 나는? 나는 그냥 열심히 뛰어다녔다. 패스하고, 리바운드 잡고, 디펜스하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팀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가끔 축구도 했다. 농구 코트 옆 잔디밭에서. 축구는 농구보다 더 거칠었다. 태클도 더 세고, 몸싸움도 더 치열했다. 하지만 그만큼 시원했다. 잔디 위를 달리는 기분, 발끝으로 공을 컨트롤하는 쾌감.
여중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걸 알 때면 더 신이 났다. 멋있게 골을 넣으면 괜히 그쪽을 흘깃 보았다. 박수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착각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착각이 우리를 더 뛰게 만들었다. 어떤 날은 여중 아이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와서 구경하기도 했다. 담장 너머가 아니라 더 가까이서. 그럴 때면 우리는 더욱 열심히 뛰었다.
겨울에는 해가 일찍 졌다. 6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해졌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운동장 전등이 켜지면 그 아래서 계속했다. 불빛 아래서 농구공의 그림자가 여러 개로 보였다. 어느 것이 진짜 공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체육관을 썼다. 실내 코트는 달랐다. 공이 더 잘 튀었고, 소리도 더 크게 울렸다.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 농구화가 바닥과 마찰하며 내는 끽끽 소리. 그 모든 소리가 어우러져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었다.
그 시절의 나는 행복했다. 시험 점수도 중요하지 않았고, 진로 고민도 없었다. 오늘 경기에서 이기는 것, 내일 더 멋진 플레이를 하는 것, 그것만이 전부였다. 복잡하지 않았다. 순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가장 순수하게 운동을 즐겼던 시기인 것 같다.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정 자체가 좋아서 했다. 승부욕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함께 뛰는 기쁨이 더 컸다. 땀 흘리는 것도 좋았고, 지치는 것도 좋았다.
어떤 날은 집에 가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너무 많이 뛰어서.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온몸이 아파도 마음은 가벼웠다. 내일 또 뛸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이제는 농구공을 잡을 일이 별로 없다. 가끔 아이와 함께 공원에서 공을 던져볼 뿐. 그때와는 다르다. 몸도 무겁고, 숨도 쉽게 찬다. 무엇보다 그때의 순수함이 없다. 운동을 해도 운동을 위한 운동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가끔 농구공이 바닥에 튀는 소리를 들으면 그때가 떠오른다. 중학교 운동장, 100미터 옆 여중, 점심시간의 25분, 방과 후의 자유시간.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때는 몰랐다. 그런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그런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는 걸. 그런 순수한 기쁨을 다시 느끼기 힘들 거라는 걸.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 운동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야, 오늘도 농구 할래?" 그 한 마디로 모든 게 시작되었던 그 시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