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없는 오후

by 생각의정원

어떤 날들은 그냥 사라져버리고, 어떤 날들은 영원히 남는다.

비가 내리던 그 오후처럼.


나는 열두 살이었다. 아니, 열한 살이었을 수도 있다. 기억이란 게 그렇다. 디테일은 흐려지지만 감정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색은 바랬지만 윤곽은 또렷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침에는 맑았는데 오후 세 시경부터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곧 굵은 빗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몇 개씩, 그러다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우산을 펼치거나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나만 덩그러니 빈손으로 서 있었다. 엄마가 아침에 우산을 챙겨주려 했는데 내가 괜찮다고, 비 안 온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어른들의 말은 늘 틀렸고, 내 판단만이 옳다고 믿던 나이였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왜 하필 오늘 비가 와야 하는 거지? 왜 날씨예보는 이렇게 부정확한 거지? 하지만 화를 낸다고 비가 그칠 리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그냥 맞고 가기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력감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해방감이었을까. 비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견딜 만했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뛸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이미 젖기 시작한 옷이었고, 빨리 간다고 덜 젖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평소와 같은 속도로, 마치 맑은 날처럼 걸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숨어들거나 우산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나만 당당히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치 비와 나 사이에 어떤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너는 내리고, 나는 맞을 테니까.


머리카락이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었다. 신발 속으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방도, 교복도 점점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가벼웠다. 뭔가를 포기했을 때 오는 그런 홀가분함 같은 것이었을까.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전히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엄마는 깜짝 놀라면서도 왜인지 웃고 있었다. "우산 가져가라고 했는데..." 하면서도 따뜻한 수건을 가져다 주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생각했다.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은 게 불행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우산 없이 비를 맞아본 게 특별한 경험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오후는 내가 처음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날이었던 것 같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만, 그보다는 피할 수 없다면 그저 받아들이라는 쪽이 맞을 것이다. 저항하지도 말고, 억지로 즐기려 하지도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비는 여전히 내린다. 지금도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우산을 가지고 다닌다. 어른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가끔, 정말 가끔은 우산을 두고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열두 살의 오후를 다시 한 번 경험해보고 싶어서.


어떤 기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소중해진다. 특별할 것 없었던 평범한 오후가, 지나고 보니 가장 특별한 순간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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