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 사람들과 한바탕 놀겠소
1. 일연 시비 앞에서
인각사 마당, 보각국사 일연의 시비 앞에 서면 시간은 잠시 고개를 숙인다.
“후세 사람들과 한바탕 즐겁게 놀겠소.”
이 문장은 다짐이 아니라 초대다. 일연은 역사를 정리하는 학자라기보다,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놀이꾼에 가까웠다. 왕의 연대보다 설화의 숨결을, 교훈보다 노래의 리듬을 남겼다. 『삼국유사』는 그래서 조용히 읽히지 않는다. 읽는 순간, 우리는 이미 놀이판 안으로 들어간다. 기록은 멈춰 있지만, 놀이는 계속된다. 시비 앞의 침묵조차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숨 고르기처럼 느껴진다.
2. 평창의 밤, 개막식
2018년 겨울, 평창 동계 올림픽의 개막식은 신화를 ‘재현’ 하지 않았다. 대신 신화가 움직이도록 풀어놓았다. 설원 위에 펼쳐진 군무는 고구려 벽화 속 춤의 리듬을 떠올리게 했고, 몸의 선과 회전은 천 년 전 무덤 벽을 빠져나온 듯했다. 그 위로 등장한 인면조, 가릉빈가의 날갯짓은 벽화의 평면을 찢고 나와 하늘로 이어졌다.
그 장면을 감싸던 음악은 분명 만파식적의 기억을 불러왔다. 파도를 잠재우고, 전쟁과 질병을 가라앉히는 피리의 가락. 직접적인 이름은 불리지 않았지만, 관객의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빠르지 않고, 강하지 않지만, 끝내 마음을 정렬하는 소리. 고구려의 춤, 가릉빈가의 날개, 만파식적의 음률은 그렇게 하나의 흐름이 되어 평창의 밤을 건넜다. 『삼국유사』는 그날, 소리와 몸짓으로 다시 쓰였다.
3. 만파식적과 가릉빈가
2018 년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
『삼국유사』의 상상력은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만파식적은 적을 쓰러뜨리는 무기가 아니라, 세상을 가라앉히는 악기다. 가릉빈가는 그 소리를 하늘과 땅 사이로 옮기는 존재다. 인간의 얼굴과 새의 몸, 음악을 연주하는 형상은 지배보다 조화를 선택한 상상력의 결정체다. 평창의 인면조는 이 오래된 선택을 현대의 감각으로 번역했다. 폭력이 아닌 리듬으로, 명령이 아닌 합주로 세계를 묶는 방식. 한국 신화는 그렇게 평화의 또 다른 언어를 보여주었다.
4. 삼국유사를 사랑한 외국인들
『삼국유사』는 한국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책에서 신화가 질서를 구성하는 방식을 읽었고, 프랑스의 작가 르 클레지오는 『삼국유사』에서 인간과 자연, 신성과 일상이 섞여 있던 오래된 감각을 발견했다. 이들은 『삼국유사』를 자료가 아니라 ‘리듬’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국경을 넘어도 이 책은 낯설지 않다. 춤과 노래, 날개와 소리로 구성된 이야기는 번역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놀이의 형식으로 남기 때문이다.
5. 인공지능시대 삼국유사와 논다는 것
일연의 문장은 오늘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평창의 개막식에서, 고구려 벽화의 춤과 인면조 가릉빈가의 날갯짓, 만파식적을 닮은 노래 가락 속에서 『삼국유사』와 다시 놀았다. 그리고 이제 그 놀이는 교실로, 화면 속으로 옮겨왔다. AI와 함께하는 수업 시간, 학생들은 신화를 분석하면서 동시에 변주하고, 텍스트를 읽으며 이미지와 음악으로 다시 불러낸다.
클릭과 프롬프트, 아바타와 가상공간이라는 현대적 감각 속에서도 ‘한바탕 놀이’는 지속되고 있다. 신화는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학생들은 각자의 언어로 응답한다. 그 과정에서 『삼국유사』는 교과서가 아니라 놀이판이 된다. 과거의 이야기가 미래의 상상력과 만나는 자리, 일연이 꿈꾸었던 ‘후세 사람들과의 놀이’는 이렇게 형태를 바꾸어 계속된다. 신화는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세대와 기술을 건너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