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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고 말해도 될까

멈춰버린 나의 인사이드아웃

by 우주숲

"아기 같아~"

반찬만 두고 서둘러 나가려던 엄마는 어쩐지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만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다시 나갈 준비를 하는 엄마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랬다간 엄마를 찾겠다고 혈안이 된 아빠를 마주하게 만들지도 모르니. 목구멍까지 차오른 서러운 마음을 내려보내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 커져버린 서러움은 눈두덩까지 올라와 얼굴을 뜨겁게 만들었다. 여기서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이 뜨거운 것이 눈으로, 입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아 나는 거실에 누운 채,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엄마를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이 아기 같다며 간만에 웃어 보이는 엄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것 같아 필사적으로 뜨거움을 견디며 누워있었다. 엄마가 떠난 후에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이나.


비어버린 머릿속처럼 새하얀 천장에 엄마와의 짧았던 만남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다 슬픈 감정이 무뎌질 때쯤 13살의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이제 그만 울고 싶어...

아빠,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면 이 싸움도 끝나지 않을까?

그럼 나도 그만 울 수 있고...'


그렇게 나는 '일찍 철든 아이'가 되어 나의 감정은 들여다보지 않은 채 아빠의 칭찬을 받기 위해,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혼나더라도 하고 싶은 건 하고 보는 언니, 동생과는 다르게 혼나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건 참고, 해야 하는 걸 했다.


효과는 있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자기 전까지 공부하는 내 모습을 보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빠는 조용히 어깨를 두드려주셨고 무언가 느끼신듯 술잔을 멀리하기 시작하셨다. 거칠게 눌리는 도어락 소리에 심장이 두근대던 밤, 이불 속에 몸을 한껏 숨긴 채 필사적으로 자는척했던 밤의 기억이 희미해질 즘 비로소 아빠와 엄마의 기나긴 싸움이 끝이 났다.


말을 잘 듣는다는 이유로 나만 하던 집안일은 날 억울하게 했고,

평화를 위해 아등바등했던 공부는 날 피곤하게 했고,

엄마 없이 잠드는 밤은 여전히 두렵기만 했지만

잘 지내냐는 엄마의 질문에, 힘들지 않냐는 아빠의 격려에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괜찮아, 할만해.'


그래야만 엄마의 한숨을 안도의 한숨으로 바꿀 수 있었기에,

그래야만 아빠의 화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줄 수 있었기에.


감정 컨트롤 타워에 불이 꺼진 채 13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엄마는 먼 지역으로 떠났고 어쩌면 새 가정을 꾸릴지도 모르겠다고 하셨다. 아빠의 상황도 비슷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잔잔한 평화가 계속되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평생 이렇게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다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며 타지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무거운 공기만이 가득했던 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자취할 준비를 마쳤다.


'이제 내일이면 완전히 새로운 나만의 삶이 펼쳐지는구나!'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일찍 일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구름 위를 걷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첫 직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직장에서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고 일을 하면 할수록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들과 비슷해 보이게 나의 모습을 잘 감춘 채 살아온 것 같았는데 저들과 나는 다른 것 같았다.


일을 열심히 해도 진전이 없었다. 결재 하나 맡으려면 발표 연습하듯 해야 할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백 번을 연습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잘 모르겠으면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 꽉 끼어버린 듯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뭐가 다른 걸까? 날개를 단듯 훨훨 나는 동기들. 그리고 여전히 바닥에 발을 딱 붙이고 서 있는 나.


내 뜻대로 일을 추진해 나가는 게 어려웠다. 질문을 하려니 바쁜 누군가를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눈치가 보였다. 입사 동기들과 모이면 어려움을 토로하며 조언을 주고받았지만 나는 문제없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괜찮아, 할만해.'


집만 벗어나면 모든 게 다 새롭게 시작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무언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고 달려왔더니 이제는 무엇이 힘든지, 슬픈지, 기쁜지, 위험한지 알 수가 없다.
누군가 나에게 쥐여준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더니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타인의 시선만 의식하다 보니 눈치만 보다 내가 해야 할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다.

괜찮은척하니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 괜찮은 척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내 능력으로만 해결하려니 나의 무능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제는 감정의 스위치를 켜야 하는데
괜찮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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