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영 글쓰기 Apr 19. 2021

상실

실화 에세이(*이름만 가명)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교실에 들어가기가 끔찍이도 싫어 복도에서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그날도 역시 지각을 했다. 부모님의 호령 때문에 반드시 '개근상' 타야 했던 나. 한숨 한 번 휴 내뱉고서 무겁게 교실 뒷문을 열었다.


드르륵


운동장이 보여야 할 창문마다 까만 커튼이 쳐져 었다. 창밖의 햇살이 안으로 거의 새어 들어오지 않 음침한 교실 안 풍경이- 내 시야의 한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


뭐지?
흐흐흑..
엉엉...어엉..엉


온통 울음바다다. 영문도 모른 채 두리번거리던 나는 처음 겪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애석하게도 리였다. 렸고 려웠고 어지러웠다.


거울처럼 똑같이 울고 있는 아이들을 지나 맨 앞자리까지- 나는 까끌까끌한 책가방 끈을 끝으로 매만지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자리에 앉기 직전이었다. 내 옆자리에 하얀  한 송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내 자리 바로 앞에 서서 책상에 안경을 놓고, 두 손바닥로 그 가녀린 몸을 지탱했. 가까이서 보니 긴 머리에 얼굴이 안 보이도록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내가 왜 우세요?라고 물었나 보다.


동영아, 네 짝꿍 지은이가 하늘나라로 어제.. 떠났단다.
선생님이 훌쩍이며 답했던 이 장면은 30년이 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흐느다. 짝꿍 있던 바로 옆-  책상과 의자를 보았다. 멍해져서 눈물이 쏟아지거나 슬프진 않았지만 선생님과 아이들이 우니까 나도 거운 눈물방울이 맺혔다. 죽음이란 게 영 실감은 나지 않았다. 가까이 있던 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인지한 건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점차 눈물로 번지는 내 앞에, 짝꿍이 자주 입었던 분홍색 드레스가 아른거렸다.


나중에 들어보니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덤프트럭이 그만 짝꿍을 치고 갔다고 했다. 적나라한 상황 묘사가 어린 내겐 적은 충격이었다. 이후로 몇 년 동안은 길을 걷다가 큰 트럭만 보면 분홍 드레스가 있을 것만 같아 자세히 보곤 했다. 도 안 되지만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그랬다. 금씩 간이 지나 겨우 겨우 정리된 내 감정은 하나였다.


상실감.


내 곁에 가까이 있던 사람이 아무런 말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날 수 있다는 . 누구든지 내 곁에 영원히 머무르는 일 따윈 없다는 개념이 진리처럼 규정된 순간이었다. 너무 일찍  배운 탓일까. 불현듯 떠나간 존재가 내게 남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허탈한 상실감에 나는 툭하면 멍해졌다.


내 쪽이 더 많은 차지를 한- 펜으로  그어진 책상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 선은 이젠 의미가 사라지고 없었다. 난 짝꿍 없는 1학년을 보내야 했고, 그 누구와도 친해지기 어려운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차피 너도 말없이 떠날 거잖아


관계에 불신이 가득했다. 소중함이나 절실함 대신 허무함이나 배신감이 내 마음을 더 지배했다. 짝꿍의 사고 이후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건 내게 늘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 일은 내 인생에 '사건'이었다.

대학시절에 미술치료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가장 인상에 남은 나의 첫 기억'을 주제로 내가 처음 그려낸 건 '상실'이란 제목의 그림이었다. 까만 커튼이 쳐진 교실, 맨 앞자리엔 국화가 한 송이 놓여있고, 반 아이들은 모두 울고 있으며 훌쩍이는 담임 선생님과 멀뚱히 앞자리로 걸어는 나. 각인된 그 교실 풍경을 그려낸 것이다.


교수님은 내게 대학원에 가보지 않겠냐고 했다. 미술치료 쪽으로 가면 어떻냐며 공개적으로 말했다. 난 그 뒤로 잠시 고민했지만 수업시간마다 다른 학생들이 그림을 들고 울면서 말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겪은 상실뿐만 아니라 타인의 상실까지도 온전공감해야 하는 순간 반복하는 일. 용기 내어 을 꺼내도록 타인의 마음을 열었다가 닫아주어야 했다. 누구든 open은 시킬 수 있지만 close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난 말하도록 유도하는 건 얼마든지 하겠는데,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다가 시간 안에 끝까지 잘 마무리할 자신이 영 없었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 친구를 잃은 상실감, 반려동물을 잃은 상실감 등 세상에는 너무 많은 상실의 기억이 결핍과 방어기제를 품고 살아가도록 한다는데 새삼 놀랐다. 그러나 그 세상이 보이고 나서는 인간이 저마다 외로운 존재이며, 혼자선 살 수 없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사람아, 너의 꽃말은 외로움이다


이 문장은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가슴속에서 빚어졌다. 외로움은 처음엔 상실감이라는 얼굴로 다가왔다가 혼자만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진 듯한 자신을 느끼게 다. CCTV로 바라보듯 그런 자신의 모습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해방감을 느낀다.


인간은 원래 외로워
그게 나쁜 건 아니야

인간은 원래 잊고 잃어버려
그게 나만의 일은 아니야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닌 일들이 있다. 물론 상실의 아픔이 가장 진한 날짜가 되돌아오면 다시 별 먹먹하게 다가오지만, 내가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정체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 상실의 늪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용기, 빠져나온 뒤돌아보지 않는 결단, 먼저 떠나간 존재에게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더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니라는 사실의 인정. 누구나 상실은 겪고 누구나 기억은 망각한다는 진리.

인간의 생이 다 이런 건데, 거기에만 꽂혀 사는 건 내 인생까지 상실해버리는 게 아닌가.

상실은 겪고 나면 그 감정에 끝이 없다. 더는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말이니까. 되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니까. 어쩌면 이미 끝나버린 걸 계속 리플레이하고 있기에 끝이 없는 것일 테다. 착각과 미련과 환상 속에서 홀로 매몰된 상태는 내 인생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걸 잊어선 안 되겠다.


그리고 상실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걸. 언제든지 일어난다는 걸. 그것이 배신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니라는 걸. 생각보다 흔한 일이고 결코 내 인생이 와르르 다 무너진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는 우울증을 '슬픔증'이라고 한단다. 우울은 겨우(?) 슬픔 하나 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인데, 왠지 더 단순화 느낌의 규정이 난 좋았다. 우리 스스로 언어에 갇혀서 살았던 건 아닐까. 외로움이란 단어를 모를 때 외로움, 우울이란 단어를 모를 때 우울은 어땠을까.


이처럼 상실에서 오는 모든 감정들을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단순화시켜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죄책감이나 자괴감 따윈 없어도 된다. 이기적인 게 아니라 독립적인 거다. 나쁜 게 아니라 정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떠난 존재에게 미안함도 거두자. 한편에 남은 건강한 그리움 정도만 남기고서.

나는 자주 말한다. 모든 관계는 '언제든 서로를 떠날 수 있음'을 전제해야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다고. 상실감은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고 이별을 맞았을 때 가슴에 심하게 맺히는 것이다. 상실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상실감에 내 인생이 져버리게 놓아두진 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믿자. 관계의 전제를 인정하자. 감정을 단순화하자. 그럼 내일이 설레는 오늘을 살 확률이 한 뼘  높아므로. 난 이렇게 버텼다.


#이동영작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