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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Jan 02. 2018

복기(復碁) 해보는 어느 날의 나이트 근무 <2>

그 옆자리엔 계속되는 혈변 때문에 수차례의 검사와 시술을 진행했던 남성 환자분이 있었다. 그는 항상 힘이 없고 창백한 모습이었다. 출혈이 잠깐 멈추었다 싶었는데, 어제 저녁부터 또 혈변을 보기 시작해 수혈을 지속적으로 시행했었다. 오늘 오전 중으로 출혈이 있는 부위를 지혈하는 시술을 다시 시도할 예정이었다. 실은 이미 몇 차례의 시도를 한 상태였지만, 지혈이 완전히 되지는 않은 것이다. 그의 시술 결과를 보려고 의무기록을 찾아보았다. 당연히 지혈술을 시행했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무 기록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가 추가 시술을 거부했다고 한다. 아마도 스스로 ‘이 모든 게 더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출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나타나는 출혈은 악성 종양에 의한 것으로, 완전한 치료가 불가능했다. 여러 번 시도했던 이유처럼 시술의 실패 가능성도 매우 컸다. 임시방편으로 지혈해본다 하더라도 언제든 다시 출혈이 발생할 수 있었다. 반복되는 출혈과 시술에 그의 컨디션은 점차 악화하여갔다. 환자의 뜻처럼 추가 시술 없이 자연스럽게 출혈이 멈추기를 바라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병실 라운딩을 하던 중이었다. 뜻하지 않게, 그의 아내분이 누워있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선 숨죽여 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저 눈물의 무게를 과연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장면을 뒤로하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밝아온 햇빛에 한 분 두 분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항생제를 투약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갔다. 잠에서 깨어 있는 그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가 답하기를 “오늘 새벽 동안엔 혈변이 안 나와서 오랜만에 잘 잤어요.”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당연할지 모르는 밤잠이지만, 밤사이 언제든 빼앗길 수 있는 몇 시간의 단잠이 그에게는 얼마나 소중했을까. 고작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다행이다. 그의 단잠에 나는 괜한 감사함마저 느꼈다.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푹 잤네.”라고 그의 아내는 애써 밝게 말했다. 뜻하지 않게 봤던 그녀의 숨죽여 우는 모습이 떠올라서였을까. 그녀의 한마디가 한참 동안 내 

마음에 걸려있었다. 아무 일 없이 푹 잘 수 있어야 할 새벽이 두 분에게는 언제나 당연할 수 없었다. 그 사실 이 안타까웠다. 남편의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고 당연할 수 없는 남편의 존재를 인정하기까지 그녀는 몇 번의 눈물을 숨죽여 쏟아야 할지 몰랐다. 그들에게 늘 당연할 것만 같던 일들이 하나둘씩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른 병실에서 간호사를 찾는 콜벨이 울렸다. 환자에게 가보니 평소와 달리 숨 쉬는 게 너무 힘들어 보였다. 호흡수를 측정해보니 1분 동안 거의 40회에 육박했다. 빠른 발걸음으로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가져와 확인했다. 빨간 불빛이 깜빡이며 알람이 울린다. 정상 수치 미만이다.

'아, 올 것이 왔다.'

환자는 설사가 계속 나와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금도 막 침대에 앉은 상태라고 했

다. 움직임에 의한 일시적인 증상일 수 있어 심호흡을 격려하면서, 산소포화도와 호흡 양상이 안정되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는 설사 때문에 다시 화장실로 갔다. 지금 당장 침대에 누워 안정시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변기 옆에서 한참 동안 추이를 확인해야 했다. 떨어진 산소 포화도 수치가 다시 오르지 않고 계속 떨어진다면 응급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다행히 점점 수치가 안정되는 듯 보여서 나는 잠깐 나가 있기로 했다.


몇 분 후 다시 와보니 환자는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심호흡을 격려하며 산소포화도를 모니터하고 있는데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급히 당직 의사에게 전화해 이 상황을 알렸다. 동맥혈 검사를 시행하고 산소를 적용하자고 한다. 당직 인턴 의사에게 전화해 동맥혈 검사를 시행해야 하는 환자가 있음을 알리고 다시 환자에게로 가서 호흡 양상이 안정되는지를 관찰했다. 산소 포화도가 점차 오르기 시작하고 환자의 호흡수도 점차 안정되는 것 같았지만, 평소 편하게 숨 쉴 때 사용하지 않던 근육까지 힘겹게 사용해가며 호흡하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동맥혈 검사 결과를 확인하니 꽤 심각한 수치이다. 한시라도 빨리 처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 당직 의사에게 검사 결과를 알렸다. 당직 의사는 직접 와서 환자 상태를 확인했다. 숨 쉬는 게 예사롭지 않았고 호흡음도 비정상이어서 지금 바로 기관지 확장을 위한 호흡기 치료를 시행하자고 했다. 최대한 빠르게 약물을 준비해서 환자에게 즉각 적용했다.


사실 이 환자는 이미 ‘호스피스 케어’를 준비하고 있던 분이다.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다. 폐암은 물론 폐혈관이 색전에 의해 막혀있는 정도도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약물을 사용하여 색전을 녹이는 치료를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혈액의 응고를 도와주는 혈소판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낮았다. 추가적인 색전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약을 쓰기도 어려웠다. ‘피를 묽게 하는 약물’을 사용했다간 언제 과량의 출혈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는 해 줄 게 없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는 곳이 바로 암 병동이다. 이미 이런 상황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은 환자의 보호자에겐 설명된 상태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환자가 생의 마지막 과정을 편안하고 힘들지 않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 여기 종양내과 간호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환자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들락날락하며 ‘대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라는 착잡함을 느꼈다. 당장 약물로 기관지를 확장하고 산소를 적용해서 산소 포화도를 정상으로 하기까지 도와드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 계속 악화하는 과정까지를 내가 어찌할 수는 없었다.


저마다의 이유로 손쓸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게 될 환자들이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누구도 피할 수 없기에 언젠간 터지고 말 것이었다. 내가 하는 간호는 환자가 ‘더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 일조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상태가 악화하는 속도에 맞추어 조치를 취하는 일이 많았다. 그 결과는 대체로 ‘죽음’으로 끝이 나곤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하는 이 행위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도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반복적으로 무기력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오늘은 세 환자의 시한폭탄을 안고 어김없이 시간에 쫓기면서 단 일분의 쉬는 시간도 없이 일했다. 사흘째 계속된 나이트 근무로 몸은 지친 상태였고 힘이 빠지자 강제로 사탕을 입에 물며 당을 공급했다. 밀도 있는 시간은 빠르게 아침을 향했고, 데이 간호사가 출근했다. 같은 환자들을 담당하면서 서로가 얼마나 바쁘게 일하는 줄 알고 있으므로 동료에겐 일종의 전우애가 느껴진다. 그래서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최선을 다해서 처리해야 했다. 그래야만 다음 순서로 일하는 간호사가 조금이나마 편히 일할 수 있으니. 오늘도 열심히 달렸다. 머리는 멍하지만 동시에 내 감정을 훑고 지나간 것들이 많았던 근무였다. 부디 꿈에선 병동이 나오지 않으면 좋겠단 바람을 하며, 약 열한 시간의 시간을 병원과 함께한 후 퇴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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