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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담유 Aug 28. 2022

시실리(時失里)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 김지혜 지음

시실리(時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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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잃은 마을을 위하여 


그대 잃을 때 내 안의 시계는 걸음 멈추리

시계를 빠져나간 시간들이 아우성치며 홍수를 타리

어디로 가는가, 물어주는 이 하나 없는 혼암의 파랑 속으로

벌거벗은 맨몸의 시간들이 부들부들 이를 부딪치며 침잠하리

그날, 구름의 흐름은 덧없고 물의 흐름은 숨소리조차 없으리니

나를 빠져나간 그대는 흐름도 정지도 없는 세상에서

비로소 소실된 별, 꺼지지 않는 한 줌 노래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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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火曜日)에 비가 내리면 연인들은 이별하고

화요일(火曜日)에 비가 내리면 이별들은 통곡한다

화요일(火曜日)에 비가 내리면 통곡들은 절규하고

화요일(火曜日)에 비가 내리면 절규들은 침묵한다

화요일(火曜日)에 비가 내리면 침묵마저 침묵하니      

온 세상 걸어 잠그고

통째로 침묵하는 빗소리여

오, 리듬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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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던 길을 되돌아보는 새는 없다

식물의 슬픔이 점점(點點) 하얗게 흔들리는 길

무더기무더기 모여앉아 집단 통곡하는 개망초 위로

죽기 위해 앞으로만 돌진하는 새떼가 날아가고     

지평선, 저 완강한 침묵 속으로

세상 모든 슬픔이 생피를 흘리며 고요히 함몰할 때

망각도 노래도 진보도 들판의 바람처럼 덧없어

그만 다리를 푹 꺾고 주저앉아 우는 강(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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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이 수의를 꺼내 입을 때 황무지의 목울대는 격렬해진다 희고 투명한 혼들이 황무지의 대동맥에서 저승꽃을 피워 올리면 세상은 울음소리 한껏 낮춰 대지 깊숙이 엎드린다 격렬해지는 건 다만 공중의 목울대뿐 그 무음(無音)의 높이에서 싹이 푸른 손을 내밀고 푸른 손을 맞잡은 공기가 황무지의 심장으로 스민다 가장 격렬한 통증이 소리 없이 결가부좌 트는 동안 울컥울컥 꽃들이 피어나고 세상의 모든 소요가 흰빛 영정 앞에 다가와 가만히 머리 숙인다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조문 와 우는 객(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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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코 입 귀 없애고

한평생 기고 조아리며

혼 낮춘 그림자     

인간의 땅 위에 드러누워

목까지 바싹 차올라 할딱거리는

저 마지막 숨이 검다     

태초의 모든 빛이 들어왔다

후루룩 온 길 모두 지우고 돌아서는

지구라는 이 질긴 숨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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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이 계절의 비루한 시간 속으로

열꽃의 몸 섞어 만개한 적 있던 지금 여기라는 환(幻)

꽃 진 자리마다 관념의 빗줄기 뭉텅뭉텅 사실(事實)로 내리꽂히고

몇몇 환골탈태의 사지는 아랫목에서도 눅지근하다, 통증아

살아 있는 모든 죽음의 각질들아, 바람이 분다

풍 맞아 입 돌아간 이 땅의 피부 안쪽으로 깊숙이

심층부터 곯고 있는 이 땅의 내장 속으로 한없이



()

     

그대와 나의 간격이 곡선으로 구부러질 때 세상의 모든 창은 불을 밝힌다 불 밝힌 창의 배경에서 직립의 욕망 낮추고 흐물흐물 허물어지는 어둠, 흐물흐물 몸 섞어 진동하는 혼, 저 무색무취 질펀한 성교(聖交)의 공간에서 그대와 나의 간격이 곡선으로 구부러질 때 세상의 모든 빛은 빛을 버린다 그 문(門) 속으로 드는 달, 흐물흐물 몸 섞던 우리의 간격이 이윽고 진동을 멈출 때 그 문(門) 속으로 드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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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모든 것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돌아가는 모든 것은 어디로 돌아오는가, 입아, 창자야, 항문아, 갈라진 벽아, 나뉜 땅아, 비어 있는 모든 틈아, 틈을 갈망하는 모든 물(物)아, 물(物)의 미혹(迷惑)아, 돌아온 것은 왜 모두 입을 벌리고 우는가, 울면서 기어가는가, 기어가고 걸어가고 날아가는가, 왜 가고, 가고, 가는가, 요 헛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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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 다 떨군

올리브나무 한 그루

들판에 섰다, 황량한

잿빛이 그의 영혼

황색이 그의 자식

잿빛과 황색이 먹어 치운

저 땅의 언어는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이다

소리가 아니라

물결,

배다     

마음아, 저 배에 불을 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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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에 핏물 들면 지평선의 일몰은 우주 바깥까지 번지며 한 점 죽어버린 원소에도 화(火)를 실어 보낼 것이다 흡반처럼 나를 빨아들이는 저 피의 블랙홀, 어머니? 아니, 아가야, 나는 결코 죽인 적이 없지만 나에 의해 여러 번 죽임당한 세월아, 내 심장이 캄캄해지면 수평선의 태양은 이 추레한 몸뚱이 미세혈관 한 가닥에도 낱낱이 출현하여 심원한 빛줄기로 터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 화(火)를 화(火)로써 다루지 않고도 화(火)를 살게 된 시간의 강물을 타고 내게로 건너오라 내 안으로 들어와 묻히라



회(回)


내가 온전히 당신이 되고

당신이 온전히 내가 되는 날

나뉜 심장이 하나로 포개지는 그날

우리의 시(詩)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

몰락해도 좋으리     

안녕, 내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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