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로 바라본 노자
원문은 생략했다. 한글로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괄호 안의 부연 설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뭇사람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큰 위험이 닥칠 수 있으니, 뭇사람이 삶을 하찮게 여기지지도, 그들의 인생을 무너뜨리지도 말라. 오직 억누르지 않아야 그들이 반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인은 비록 알더라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비록 아끼더라도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71장에서 사회의 꼰대와 소크라테스 당시 아테네 사람들의 병폐에 대해 언급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그렇지 않다거나 이런 소릴 하는 게 뭔 소용이냐 묻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는 그가 청년들을 선동하고 신에 대한 불경을 저질렀단 부당한 이유였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인 ‘중우정치(우매한 민중의 지배)’에 넌더리가 났고, 이를 비판하며 소크라테스와 같은 훌륭한 사람(철인)의 다스림을 추앙하며 ‘정체(국가)’라는 책을 썼다. 영원한 고전이 된 책. 오늘날 세계 지도자들을 보면 플라톤이 ‘아주’ 틀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욕을 당했다 여기는 모든 꼰대들은 상대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치명타를 가한다. ‘남 위에 군림하는 일’은 묘한 쾌감을 선사할 수 있으나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짓밟는 일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것은 ‘갑질’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이 따라하는 중이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그것을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뭇사람이 삶을 하찮게 여기지지도, 그들의 인생을 무너뜨리지도 말라. 오직 억누르지 않아야 그들이 반발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통치자에 대한 조언처럼 보일 수 있다. 일종의 정치적 기술. 물론 이것이 훗날 법가로 이어져 통치술로 변형되기도 했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러했듯, 노자는 진정한 또는 진실한 지도자의 출현을 바란다. 누구에게나 귀감이 되는, 롤모델이 되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성인은 비록 알더라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비록 아끼더라도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진심으로 그렇고 그래야 한다.
유럽의 중세를 ‘암흑의 시대’ 라 부르는 이유는 72장에 묘사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종교 지도자들인 교황과 사제들이 세속의 권력을 장악하고 뭇사람을 업신여기고 그들을 구속하고 억압했다. 누군가 반발하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마녀사냥으로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따르지 않으면 죽음을!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어둡고 축축한 시대를 벗어나는 하나의 상징적인 철학이 등장했다. 그런 말 안 되는 권위나 위엄 따위 버리자며. 여기에 더해 신(God)의 굴레마저 던져버리자며. 그리고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 자신의 힘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다시 지어 올리자며.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간과되어 왔다. 이 말만큼이나 중요한 문장, “나는 회의한다(의심한다).”이다. 바로 방법적(수단으로서) 회의이자 의심.
회의하고 의심하다
나의 믿음에 대해
대체 무엇에 대해? 72장에서 보듯 너의 권위와 나의 지식에 대해. 너의 위엄과 나의 권리에 대해. 너의 잘남과 나의 부족함에 대해. 여태 우리가 믿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 진정 진실인지, 믿을만한 가치인지에 대해, 의심하고 회의하라.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간은 생각한다’는 가치를 세상 모든 것의 ‘추춧돌’로 세우자.
이것이 데카르트의 목표였다. 노자의 성인 역시 데카르트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을 터.
*노자 도덕경 1-30장은 아래에서
https://brunch.co.kr/brunchbook/taoteching
*노자 도덕경 31-60장은 아래에서
https://brunch.co.kr/brunchbook/taoteching0
*관련 도서(내 책)
2023 세종도서 선정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철학>(믹스커피)
살림지식총서591 <도가>(살림출판사)
*노자 도덕경, 왜 부와 풍요의 철학인가?
https://www.basolock.com/richness-taotec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