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淨化

1화: 피폐한 삶

by 장가모

눈을 뜨면 하루를 시작하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온몸을 뒤덮어 쥐구멍에 숨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다시 질끈 감았다.

두려움이 조금 상쇄되는 기분이 들어 안도감이 들었다.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한다면

이 괴로운 삶에서 모든 게 해방될까.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의심했다.

무언가가 나를 강한 힘으로 억누르고 있다.

공허함과 우울감과 불안감이 더해진 복합적인 감정의 그 무언가.


그렇게 1시간가량을 사투를 버리고

꾸역꾸역 침대에서 기어 나와 옷을 걸쳐 입는다.

오늘따라 집이 유독 어둡다.

날이 많이 흐린가 보다.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집은 조용하고

그림자진 행거에 걸려있는 수많은 옷들은 마치 어둠의 정령같이 보인다.


'바나나라도 먹어야 하나.'


배가 고파 거실로 나가니

그제 샀던 샛노란 바나나가 어느새 검은 점이 생기더니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새까매졌다.


집어 들었다.

수많은 초파리 중 커다란 한 마리가 눈알을 탁 때렸다.

앗. 나도 모르게 바나나를 쌔게 쥐어버렸다.

오른손이 바나나 범벅이 되어버렸다.


질퍽하고 기분 나쁜 물컹함에

소리를 지르며 손을 벅벅 씻었다.


후드 집업, 검은 볼캡을 꾹 눌려 쓰고

어려운 한걸음을 내디뎠다.

역시 밖에 비가 내렸다.

다행히 구슬비다.

오늘도 조금 늦은 느닷없는 하루가 시작됐다.


구슬비를 맞으며

익숙한 15분을 걸으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감옥에 있을법한 검은 쇠문을 열고 들어가니

눈 화장을 진하게 한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카운터 직원이

나를 하찮은 듯 흟겨보더니 “성함이요?”라고 물어봤다.


나는 이름을 말하고 아무도 없는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서 순서를 기다렸다.

앉은 지 1분이 채 되지 않아 호명된 이름을 듣고 '진료실'이라고 적힌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민머리에 동그란 호피무늬 안경테를 쓴 의사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았다.


"잘 지내셨어요. 어떻게?

약은 다 복용하셨어요? "


퍽 인상이 좋으신 아저씨는 밝은 미소로 살갑게 내게 말했다.


“네, 물론이죠.”


그렇게 익숙한 나의 이야기와 1달 분량의 항우울제를 복용받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호우가 쏟아졌다.

분명 구름 틈 사이로 환한 햇빛이 보임에도 비는 소리를 지르듯 정신없이 내렸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보이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은 비를 맞으며 서로를 밀치며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더니 신호가 바뀌자 잽싸게 달려갔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모든 소지품을 소파에 던지고 다시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웠다.

그러곤 천장을 멍하니 쳐다봤다.

미세한 진동 소리가 두 번 짧고 강하게 울렸다.

자리에 일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


내일부터는 출근 안 하셔도 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짧은 두 문장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읽었다.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침 9시에 일어나 바나나 하나와 시리얼을 허겁지겁 먹고 양치는 생략한 채

9시 20분에 집 밖으로 뛰쳐나가 54번 버스에 허겁지겁 올라타지 않으면 될 일이다.


‘3개월, 그래도 많이 버텼네.’


나는 파트타임으로 배달 주문이 많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3개월간 밥줄을 간신히 붙들어 매고 살아가고 있었다.


익숙한 백수 생활이 반갑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맞이하게 됐다.


'뭐 어쩌겠냐.’


침대에 누워서 숏폼만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배낭에 필름 카메라, 책, 물병을 챙기고 무작정 집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다대포 해수욕장행 1호선에 올라탔다.


목요일, 오후 2시 14분 1호선 지하철은

가지각색의 꽃무늬 옷차림과 싸구려 미용실의 파마 약품 냄새가 가득했다.

가방에서 작은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동네책방에서 산 이름 모를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어르신들의 매서우면서도 호기심 강한 눈빛이 느껴졌다.

점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서 책을 덮고 눈을 잠시 감았다.


“일어나요. 종점 다대포 해수욕장 역입니다.”

남성의 굵직한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남자 역무원이

나를 위에서 밑으로 빤히 쳐다보며 하찮은 눈빛으로 말했다.


‘알겠다고요. 그렇게 쳐다볼 필요까지 있습니까. 하여간 부산 남자들은..’

계단을 저벅저벅 올라가 2번 출구로 나갔다.


우선 바로 앞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 들어가

햄버거 세트 하나를 허겁지겁 먹었다.


그런 다음 '몰운대'라는 곳으로 향했다.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자 등산 코스가 눈에 보였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까치 3마리가 바스락바스락 나뭇잎을 밟으며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 길을 따라 생각 없이 올라가다 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바다는 광활했고 파도의 움직임은 간결하고 또 차분했다.

그러고는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의 전함 200척을 최초로 목격하고

그 사실을 보고했던 봉수대에 서있는 병사의 심정을 생각했다.


전함 200척이라. 아찔하다 못해 심장이 덜컹하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돌린 후 더 깊은 산속으로 향했다.

오후 5시 17분, 정상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동그란 해의 움직임을 아주 상세하게 볼 수 있었다.

해가 산 위에 걸터앉았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xxx 씨 맞으신가요?”

“예. 맞는데요.”

“xx천국 이력서 보고 연락드렸어요.

바리스타 xx님 맞으시죠?

다음 달에 브런치 가게를 오픈할 예정인데 저희랑 같이 일하시지 않을래요?


말 끝에 ㅇ받침을 붙이는 말투에서 조금은 인위적인 친절함이 느껴졌다.


“아. 제가요. 오늘 직장에서 잘렸거든요. 당분간은 일 안 할 생각이에요. 죄송합니다.”

“아이. 그러지 마시고 제가 시간은 그쪽 편한 데로 다 맞춰드릴게요.”


나의 보잘것없는 이력서에는 그렇다 할 경력이 없었다.

대패 삼겹살 집 2개월, 프랜차이즈 카페 3개월이 전부였다.

'이 분은 날 왜 바리스타라고 부르는 걸까.'


나는 이 아저씨가 사기꾼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나는 반감이 드는 동시에 호의에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아저씨가 말했다.


“그러면 일단 면접 보러 한 번 와요. 다음 주 월요일 어때요?”

“잠시만요.”

나는 우선 마음이 결정되지 않아 우선 시간을 끌었다.

이에 아저씨는 말했다.

“그러면 그렇게 알겠습니다. 그때 봅시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가 끊겼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