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진료실이 좋다

출근이 ‘회복’이 될 줄은 몰랐다

by 김보민

사람들은 출근을 ‘전쟁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 출근은, 집이라는 전쟁터에서 잠시 피난 오는 시간이다.

물론 병원에서도 전투는 있다.

“선생님, 약은 안 먹고요, 민간요법으로 버텼어요.”

이런 폭탄 발언이 터질 때면 속으로 ‘그럼 왜 오셨어요...’ 하는 생각이 올라오지만,

그래도 집에서 삼남매와 하루 종일 부대끼는 것보단 평화롭다.


집이라는 ‘무한 난전 모드’

아침 7시. 알람이 아니라 세 아이의 삼중 호출음이 나를 깨운다.

“엄마, 체육복 어딨어?”

“엄마, 오빠가 내 색연필 훔쳐갔어!”

“엄마, 교복 구겨졌어, 다시 다려줘!”

이건 단순한 멀티태스킹이 아니라, 멀티 스트레스킹이다.

집안일, 육아, 살림전쟁이 동시에 벌어진다.

아이들이 없으면 가전제품이 울고, 가전제품이 잠잠하면 택배 초인종이 울린다.

그마저 없으면 내 마음속 죄책감이 소리친다.

“빨래 아직 안 널었잖아!”

“밥이 너무 오래됐네. 새로 해야겠다.”

아이 셋이 어릴 때 나는 약 3년 동안 전업주부로 지냈다.

솔직히 처음엔 편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세상과 단절된 채 집 안에 갇혀 살다 보니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 시절은 몸보다 마음이 더 지쳤던 시간이었다.¹

그래서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 사실은 두려웠다.

“너무 오래 쉬어서 다시 잘할 수 있을까?”

불안감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²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료실 의자에 다시 앉는 순간

묘한 설렘이 피어났다.

‘그래, 이게 나였지.’

그때 느꼈던 감정은 오랜만에 ‘나 자신’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출근하면 생기는 ‘기적’

출근해서 진료실 문을 닫는 순간, 세상에나 —

정적이 찾아온다.

책상, 의자, 청진기. 전부 내가 두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집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안정감이다.

(집은 10분 만에 인테리어가 ‘아이들 작품’으로 리모델링된다.)

진료실에서는 환자와 나, 1:1의 대화가 가능하다.

집에서는 1:3 대화가 기본이고,

심지어 내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이 돌아온다.

많은 워킹맘들이 이렇게 말한다.

“집에서 일하는 게 더 힘들어요. 회사는 점심시간이라도 있잖아요.”

집에서는 점심시간이란 개념이 없다.

내 점심이 뭐였는지 떠올리면,

애들 남긴 피자 조각이나 식은 김밥 한 줄이 전부다.

그래서 워킹맘들끼리 농담처럼 말한다.

“회사 출근이 휴가고, 집이 진짜 직장이다.”


환자가 주는 위로

“선생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 한마디면 오늘 하루가 값져진다.

집에 가면 설거지가 산더미여도, 아이들이 숙제를 안 해도,

그 말 한마디가 오늘을 버틸 에너지가 된다.

사람들은 내가 환자를 치료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환자들이 내 마음을 치료한다.


다시 일한다는 것

진료실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탈진했을지도 모른다.

출근은 내게 ‘휴식’이자, 환자들은 나를 회복시켜주는 힐러다.³

가끔 너무 지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도 있다.

하지만 100세 시대에 일을 멈추고 몇십 년을 쉰다면,

그게 오히려 나에겐 더 큰 우울이 될지도 모른다.⁴

그래서 나는 나이 들어서도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꾸준히 일하고 싶다.

누군가를 돕고, 의미를 느끼며 살아가는 일.

그게 나라는 사람의 리듬이자 삶의 방식이니까.


『워킹맘의 진리』

“엄마는 출근하면 쉰다.

집에 오면 야근 시작이다.”

— 전국 워킹맘의 숨겨진 진심


**주석

1.전업주부의 고립감과 자아상 상실 —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전업주부의 42%가 “사회적 관계 단절과 자아상 상실”을 경험한다고 보고함.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1)

2.경력단절 후 복귀 불안 — 여성가족부 조사에서 경력단절 여성의 68%가 “업무 적응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감 저하”를 경험했다고 응답함. (여성가족부, 2020)

3.일이 주는 심리적 회복 효과 — 심리학자 Marie Jahoda는 ‘일의 잠재적 기능(latent functions)’ 이론에서, 일이 생계 수단을 넘어 ‘사회적 인정, 시간 구조화, 정체성 유지’에 기여한다고 주장함. (Employment and Unemployment: A Social-Psychological Analysis, 1982)

4.노년기의 일과 정신건강 — WHO는 “적절한 사회적·직업적 활동이 노년기의 인지 기능 유지와 우울감 감소에 기여한다”고 제시함. (Active Ageing: A Policy Framework,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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