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시작'이자 '마침표'
2025년 3월 18일
하원하고 집에 들어오면 아이는 언제나처럼 식탁 앞으로 갔다.
그 무렵 아이는 포장놀이에 푹 빠져 있어서, 가방만 내려두고 곧장 가위와 종이, 스티커, 테이프를 꺼내 자기만의 작업을 시작하곤 했다.
나는 부엌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임연수어를 굽고 있었다. 팬에서는 기름이 잔잔하게 지글거렸고, 옆에서는 미역국이 은근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밥솥에서는 밥이 거의 다 된 밥 냄새가 치익 새어 나왔다. 저녁 준비 소리들 사이에, 식탁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작은 움직임이 조용히 섞여왔다. 종이를 만지는 바스락 거림, 테이프가 떨어지는 짧은 기척, 가끔은 "아휴… 안 되네…" 하는 작은 혼잣말도 들렸다.
식탁 위에는 A4용지와 보라색 테이프, 반쯤 쓴 딱풀, 스티커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이는 종이를 돌돌 말았다가 다시 펴고, 양쪽 끝을 비틀어 사탕 모양을 만들려는 듯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다 결국 테이프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엄마, 이거… 잘 안 돼.
풀을 감싸서 사탕 모양으로 포장하고 싶은데 계속 이상하게 돼."
아이가 건넨 종이에는 군데군데 접히고 비틀린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종이를 다시 말아 모양을 잡아준 뒤, 아이가 건넨 보라색 테이프로 단단히 감아 주었다.
"와, 사탕 모양이다!"
아이는 한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완성 된 포장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나에게 가져왔다.
"엄마, 나 키워줘서 고마워.
이건 선물이야"
맑게 웃는 아이모습.
그 순간, 집 안의 모든 흐름이 잠시 고요해진 듯했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아이의 입에서 이토록 또렷한 마음이 흘러나올 줄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 엄마의 돌봄은 당연한 일이라고만 여겨왔는데, 아이는 그걸 '받은 사랑'이라고 느끼고 있었구나. 그 속에서 '고마움'이라는 감정, 그 마음을 말로 꺼내 놓을 줄 아는 아이의 마음의 깊이를 나는 그날 처음 보았다.
나는 아이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엄마는 네가 내 딸로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행복해. 하늘 만큼, 우주만큼 사랑해."
육아는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지만, 가끔은 '아이에게 쏟은 정성과 그 시간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불현듯한 외로움이 찾아왔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엔 불안과 답답함, 우울함이 스며들때도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뜬 아침마다 '오늘도 잘 해내자'라는 다짐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모양과 무게, 속도는 서로 같지 않아도, 아이는 아이만의 방식으로 엄마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네 살 이 되어서야 비로소 '받은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5세 아이가 건넨 '고마움'의 말은 그동안 흘러가던 평범한 일상의 흐름을 완전히 멈춰세운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사진처럼 남길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워, 나는 선물과 아이의 말을 짧게 기록해 두었다. 그때 적어둔 문장은 '다섯 살 기록의 시작'이 된다.
2026년.
곧 여섯 살이 되는 아이는
자라면서 예전보다 더 깊어진 질문들을 건네고 있습니다. 단순히 감성적인 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요즘은 호기심의 방향도, 생각의 깊이도 조용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자라는 마음의 모습이 저에게도 새롭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아마 여섯 살의 기록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남겨질 것 같습니다. 아이의 변화에 따라 제가 바라보는 시선과 글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달라지겠지만, 마음을 기울여 바라보는 결 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글을 마지막 이야기로 남기며
다섯 살의 기록을 조용히 닫습니다.
함께 마음을 나누어 주신 모든 분들께
따뜻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