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쓰레기들보다 더 독했던 건, 내 안의 불안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불안의 색은 다르다. 문제는, 내가 겪은 불안이 내 팔레트에 없는 색이었다는 것이다.
이력서를 열람해 보았다. 경력 10년 1개월, 그간 다닌 회사 6군데
첫 번째 회사, 속한 분야에서 알만한 대기업
퇴직 사유 : 권고사직
권고사직을 받기 3개월 전에, 알 수 없는 정장 입은 다수의 사람들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선 사무실의 서류들을 들고서 나갔다. 퇴사한 이후에도 그 사람들이 어디 소속 사람들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 후에 3개월가량 월급이 지연될 거라는 사측 소식을 들었고, 3개월 후에 대략 14명 정도의 신입들이 권고사직을 받았다.
두 번째 회사, 소기업
퇴직 사유 : 퇴근을 못하게 한다.
일이 없음에도 상사들이 퇴근하지 않으면 나 또한 퇴근하지 못하는 조직이었다. 이건 직접 상사에게 들은 얘기이다. "김 사원 상사들이 퇴근을 안 했으면 남아서 공부를 하던지 해야지, 먼저 퇴근하는 건 안돼"
총 1년 5개월 다니면서, 칼퇴근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왜냐, 선임들은 본인 업무가 끝나면 퇴근하지만 적어도 누군가 한 명은 남아서 야근을 하기에 결국 나는 거의 주 5일이 야근인 셈이다.
세 번째 회사, 소기업 및 특허기업
퇴직 사유 : 과로사할까 봐서
주 7일 기준 평균 근무 시간이 대략 92시간, 이 당시의 상황은 좀 특이했다. 선임이 너무 일을 하기 싫어했다. 모든 업무를 나에게 알려줬다. 던지는 대로 잘 받아서 숙지했다. 그리고선 지옥문이 열렸다. 주중 퇴근시간 새벽 2, 토요일+일요일 합쳐서 대략 12시간 정도 근무. 이러한 강도의 업무를 대략 1년 2개월 하였고, 업무 숙지 기간은 대략 3개월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네 번째 회사, 중견기업
퇴직 사유 : 업무 과다, 연봉 협상 결렬
역피라미드형 인력분포 (대부분이 차장 이상의 직급)
그 당시 나의 직급이 대리였으며, 나를 제외한 신입이 3명이었다. 그 외에는 전부 차장 이상 직급이었다.
신입들에게 짬처리를 시킬 수 없어니, 내가 진행하는 개인에게 주어진 프로젝트 및 선임들이 던지는 서브 프로젝트까지 포함하여 그 당시 설계팀에서 가장 많은 업무량을 담당하고 있었다.
연봉 협상 시즌에 인사팀에 원하는 연봉 및 사유를 얘기했으나, 연봉은 원하는 대로 안 올려주면서 일은 미친 듯이 시키기에 퇴사
다섯 번째 회사, 소기업, 역대 양아치 회사로 기억되는 곳
퇴직 사유 : 4대 보험 체납, 급여일 안 지킴, 퇴직금 달라고 미친 듯이 싸워서 겨우 받음.
4대 보험 체납 기간이 대략 1년 정도 지속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은행 대출에 영향을 받았다. 사측에 4대 보험 체납을 해결하라고 얘기했으나, 돈이 없다면서 배 째라 식이었다. 결국 대출상품을 변경하면서 은행 이자가 2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급여 지급이 원래 급여일을 기준으로 일주일에서 이주 정도씩 밀림.
퇴사 후에 알고 보니, 나보다 먼저 퇴사한 사람은 1년이 넘도록 퇴직금을 못 받고 있던 상태였다. 3개월간 독촉해서 겨우 퇴직금을 받아냈다.
여섯 번째 회사, 무개념 오너의 끝판
퇴직사유 : 갑작스러운 회사의 이전
회사 이전소식을 직원들에게 통보한 후에 통보한 날을 기준으로 3주 후에 회사 이전함.
이전한 주소지를 기준으로 왕복 통근 시간이 3시간 20분인 관계로 사직서 제출.
이때에 퇴사한 직원들 전부 권고사직 처리되었으며, 실업급여 신청이 가능했다.
여태까지 다닌 회사들에 대한 퇴직사유를 개략적으로 적어보았다.
그나마 기술직으로 이직을 여러 번 했기에, 아직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다른 분야는 일을 해보지 않았기에 어떤 상황이 되었을지 예상하지 못하겠다.
위에 적은 여섯 군데의 회사의 퇴직 사유를 보면 납득할 만한 사유가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애매한 퇴직 사유라면 네 번째 회사인데, 이 회사 또한 정확히 적자면 사유가 그럴듯하다.
설계 엔지니어로서 담당하는 프로젝트마다 협의를 보는 시간이 있다. 다른 회사 사람들과 만나거나 혹은 전화하거나 하는 업무 또한 설계에 포함된다. 9 to 6라는 시간 동안에 설계직임에도 불구하고 5시간가량을 전화기만 붙잡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만큼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많았기에 정말 본 설계에 대한 업무는 6시 이후에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다시 시간을 돌려서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6군데의 회사에서 나와 같은 직급의 사람들은 모두 퇴사를 택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번번이 느끼는 것이다. 특히나 이직이 잦았기에 매번 과거의 퇴사를 떠올려본다. 과연 이번 퇴사는 정말 신중한 선택인가? 아니면 나의 고질병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도 건성건성 대충 일을 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몸이 축나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고, 욕을 먹도 그냥 가면 될 것이고, 또한 아득바득 배우고 익히려고 하지 않았다면, 개인 시간을 내어서 공부를 하지 않음으로써 업무 역량을 늘리지 않았더라면 이직을 여러 번 하지 않고서 한 회사에서 꾸준히 설렁설렁 다닐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기근속하시는 분들이 무능하다던가, 일을 대충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장기근속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을 적어본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한 회사를 오래 다니게 된다면 과연 회사는 나를 책임져줄 것인가? 아니다, 회사에서 개인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인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다니고 있는 그 시간 동안에만 나에게 주어진 자리일 뿐이다. 누구든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 내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랬던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엔지니어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었다. 실제로 구조물에 대한 설계가 잘못되는 경우도 빈번하며 이러한 경우에는 결국 구조물은 붕괴하며 인명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둘째, 업무 역량을 키움으로써 회사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잔소리를 듣지 않는 포지션에 서고 싶었다.
셋째,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력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회사에 아쉬운 것이 아니라 회사가 나를 아쉬워하게끔 하고 싶었다. 또한 이 회사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연연해하지 않게끔 실력을 키우고 싶었다.
결국은 내가 선택한 방향은, 회사를 위한 방향이라기보다는 나 개인에게 보다 치중한 방향이다.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향을 찾은 것이 아니라, 나 개인이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간 결과이다.
하지만, 위에 적은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한'이라는 말 또한 나 스스로를 속이는 말일지도 모른다.
연재 시리즈에 다섯 번째 인간쓰레기까지 적었다. 그리고 그 쓰레기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불안'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사람마다 가진 불안의 색깔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다는 자신의 팔레트에 보다 많은 색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보다 많은 상황과 부담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나의 팔레트는 사회생활을 시작할 당시에 텅 비어 있던 것 같다. 하나하나 겪어가며 불안의 색깔을 채워갔다. 그렇게 채워감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내 팔레트에는 담을 수 없는 불안의 색들이 있다.
언젠가는 팔레트가 오색찬란하게 수많은 색으로 가득 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다는 건 수용할 수 있는 불안과 어두운 색들을 자신의 팔레트에 가득 담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내가 퇴사한 6곳의 회사는 여전히 운영되고 있으며, 그곳에는 아직도 누군가 직원으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퇴사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그 순간이 오면 눈앞에 불안의 색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색은 점점 선명해진다. 그 순간에 '이 색을 앞으로 계속 바라보면서 이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보통은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오면 '아니, 다닐 수 없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물론 내가 쉽게 받아들이는 불안의 색들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같은 팀 내에 속해있는 대부분이 어렵고 부담스러워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을 때에 드는 '부담감'의 색은 의외로 팔레트에 쉽게 담을 수 있는 불안의 색깔이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불안의 색깔이 있다. 문제는, 내 팔레트에는 끝까지 담기지 않는 색이 몇 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불안을 ‘색’으로 나누어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색들이, 나에게는 하루만 바라봐도 가슴이 조여 오는 색이었다. 그리고 그 색들은 대략 이렇게 분류할 수 있었다.
1. 회색 불안 : 일상의 압박, 그러나 금세 익숙해지는 색
회색 불안은 말 그대로 흐릿하다. ‘오늘 일 조금 많은데?’ 정도의 느낌.
업무량이 많아도, 협의 일정이 겹쳐도, 어찌 되었든 해결하면 사라진다.
내가 맡은 일이 팀에서 가장 많아지는 순간에도 이 회색은 금방 옅어진다.
이건 누구나 한 번쯤은 겪고, 나 역시 크게 흔들리지 않는 색이었다.
문제는 이건 익숙해지는 종류의 불안이라는 점이다.
해결하면 사라지고, 다시 해결하면 또 사라진다.
그래서 이 회색은 내 팔레트에 가장 많이 묻어 있는 색이다.
2. 남색 불안 : 책임이 커질 때 번지는 묵직한 색
남색은 책임과 맞닿아 있는 불안이다.
업계에서는 “업무 역량”이란 말을 많이 한다.
이 역량이 커질수록 남들이 던지는 일도, 맡아야 할 일도 많아진다.
남색 불안은 ‘잘 해낼 수 있을까?’보다 ‘이번엔 또 어떤 일이 생겨날까?’에 가깝다.
이 색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어두워지지만, 또 어느 정도는 익숙해진다.
내가 엔지니어로서 욕 들을 일 없는 위치에 서기 위해 달려오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색이다.
그래서 남색은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색이다.
3. 붉은 불안 :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올 때 번쩍이는 위기 색
붉은 불안은 예고 없이 온다.
갑자기 월급이 밀린다든가, 회사가 3주 뒤에 이전한다든가,
정체불명의 정장 차림 사람들이 사무실 서류를 들고나갔다든가.
이런 순간에는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건 개인의 역량이 부족해서 생기는 불안이 아니다.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막지 못하는, 외부 변수로 인한 결정적 색이다.
이 색은 단 한 번만 봐도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 번지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색을 덮어버린다.
4. 탁한 초록 불안 : 인간쓰레기에게서 피어나는 독초색
이건 내가 1~5편에서 적어온 바로 그 색이다.
상사들의 갑질, 책임 회피, 말도 안 되는 지시, 감정 노동.
이 불안은 희한하게도 스스로 번식한다.
일을 아무리 잘해도, 아무리 능력을 키워도,
‘저 인간’ 하나 때문에 회사 전체가 초록색 공기처럼 독해진다.
이 색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인간쓰레기에게서 피어나는 불안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초 같은 색이기 때문이다.
5. 검은 불안 : 퇴사를 불러오는 최종 색
그리고 마지막, 가장 강력한 색.
내가 끝까지 견디지 못한 색.
불안이 아니라 ‘경고’에 가까운 색.
색이라기보다 그림자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 검은색이 보이기 시작하면 어떤 회사든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이 검은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진다.
그리고 결국엔 내 손을 사직서 위로 끌고 간다.
불안의 색을 이렇게 나누어 본 뒤에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불안의 크기가 아니라, 그 불안이 내 팔레트에 존재하는 색인지 아닌지라는 것을.
회색, 남색, 초록은 어떻게든 시간을 들이면 내 팔레트 안에 자리 잡는다.
하지만 검은색 불안만큼은 단 한 번도 담아본 적이 없다.
몇 번을 시도해도 거부감이 생기고, 팔레트 위에 올려놓는 순간 부서져 버린다.
그리고 그 검은색을 회사에서 처음 보기 시작한 순간이,
바로 내가 퇴사를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검은색 불안이 팔레트 위에 번지기 시작하면, 나는 더 이상 그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없었다.
결국 사직서를 내밀고, 마지막 퇴근길을 걸어 나오면 늘 같은 생각이 따라붙는다.
‘이제 끝났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말 뒤에는 언제나 작은 승리감도, 해방감도, 시원함도 아니다. 대신 설명하기 어려운 커다란 공허함이 남는다. 어쩌면 나는 늘 “견디지 못해서” 퇴사한 게 아니라, 어떤 색을 팔레트에 담을 수 없는 나를 매번 확인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판단할 사람도 없다. 결국 인생에서 각자가 견딜 수 있는 불안의 색은 다르니까.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그 회사는 그대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하고, 내 자리는 곧 다른 사람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나는 혼자, 비워진 팔레트를 들고 새로운 회사로 향한다. 색을 버리고 나온 건 나인데, 정작 가장 비어있는 것은 내 마음이라는 사실을 퇴사할 때마다 똑같이 느낀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이번 회사에서 떠나는 발걸음 역시 누군가에게는 경력 관리일 뿐이고, 누군가에게는 계산된 이직일 뿐이겠지만 나에게는 또 하나의 색을 비워내는 일이다. 그리고 비워진 공간엔 잠시 아무 색도 머물지 않는다. 그 빈자리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고, 그 조용함은 때때로 두렵고, 그 두려움마저도 어느 순간 익숙해지는 색이 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아직 그 색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한동안은 색이 없는 공허함 속을 걸어가는 수밖에.
ps)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2월이 다가오고 있네요.
또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12월에도 반갑게 여러분과 글을 앞두고서 마주하고 싶어요. 생각보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적으면서 독자분들을 마주하는 게 너무 즐겁더라고요. 독자분들에게도 즐거움이 가득한 오늘과 내일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