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원과의 면담, 나는 HR 영업사원이 되기로 했다.

데이터인듯 데이터 아닌 데이터로 증명한 '듣는 시간'의 힘

by 인싸담당자 신민주

경력 공백을 깨고 다시 돌아온 현장은 전쟁터 같으면서도 생경했다. 3년 만에 다시 명함을 팠고, 내 이름 뒤에는 'HR 조직문화 담당'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의욕은 넘쳤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 속 규정집만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이 조직의 진짜 공기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나는 무식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바로 '전 직원 1:1 면담'이었다.


당시 우리 회사의 구성원은 약 100명. 나는 입사 첫 달, 직책자를 제외하고 70명 전원을 만나 이야기를 듣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루에 3명씩, 한 사람당 1시간 이내. 단순히 계산하면 근무 시간의 40% 가까이를 면담에 쏟아붓는 셈이었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체력 싸움이었다. 면담이 진행되는 낮 시간 동안에는 실무를 볼 틈이 없었다. 밀린 기획안 작성이나 행정 처리를 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매일 아침 7시,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불을 켜고 부족한 업무량을 채웠다. 그리고 10시가 되면 회의실로 들어가 틈틈이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적고, 공감했다.


누군가는 물었다. "그거 너무 비효율적인 거 아니에요? 굳이 다 만날 필요가 있나요?" 틀린 말은 아니다. 효율성을 따진다면 설문조사 한 번 돌리는 게 훨씬 빠르다. 하지만 나는 이 지난한 과정이 인사(人事), 즉 사람과 관련된 일을 하는 우리의 '근간'이라고 확신했다. 텍스트로 된 설문 응답에는 표정이 없고, 목소리의 톤이 없으며, 행간에 숨겨진 진짜 니즈가 없다. 나는 그들의 눈을 보고 이야기하며, 우리 조직이 앓고 있는 통증의 부위가 어디인지 정확히 짚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좋은 청자(Listener)'로 남을 생각이 없었다. 공대 출신인 나의 기질이 발동했다. 나는 면담 내용을 감성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하게 데이터화했다. 면담 기록 페이지를 만들고, 구성원들이 쏟아낸 이야기들을 키워드별로 분류했다. '소통', '보상', '성장', '복지', '업무환경'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누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불만과 요구사항에 점수를 매겨 우선순위를 정했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경향성'이 그래프처럼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분위기가 좀 딱딱해요"라고 느끼던 감각들이, "구성원 70%가 타 부서와의 교류 부재로 인한 업무 병목을 호소함"이라는 명확한 데이터로 치환되었다.


면담 브런치.png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획안을 작성하니 보고와 설득의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수월해졌다. "그냥 직원들이 원합니다"라고 말할 때는 반려되던 기획안들이, "인터뷰 분석 결과, 00명 중 00명이 A에 대한 필요성을 언급했으며, 이는 전사적인 니즈의 00%에 해당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 제도가 필요합니다"라고 근거를 제시하자 프리패스로 결재가 났다.


경영진 입장에서도 명확한 근거가 있으니 의사결정이 빨라졌고, 나는 그 덕분에 구성원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실현해 나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HR 담당자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했다. 우리는 관리자가 아니라, '구성원들에게 더 좋은 제도를 서비스하는 영업사원'이어야 한다고.


영업사원이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지 않고 물건을 팔 수 없듯, HR도 구성원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제도를 만들 수 없다. 내가 아침잠을 줄여가며 가진 70시간의 대화는 단순히 니즈 파악을 넘어선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신임 조직문화 담당자가 낯선 산업과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업무를 가장 빠르게 학습하는 시간이었고, 낯선 이방인이었던 내가 그들과 눈을 맞추며 단단한 라포(Rapport)를 형성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 모든 과정이 내 HR 영업 활동의 가장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비효율적으로 보였던 그 시간들이 쌓여, 우리 조직에는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구성원들이 "이 회사가 내 말을 들어주는구나"라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신뢰라는 자본이 쌓이자, 나는 본격적으로 판을 벌일 준비를 마쳤다.


다음 화부터는 이 치열한 면담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제로 우리 조직에 어떤 제도들을 도입했고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나의 '영업'이 어떻게 '대박 상품'들로 이어졌는지, 그 흥미진진한 메이킹 스토리를 기대해주시라.

keyword
월, 목 연재
이전 02화경력단절의 33살,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