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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울어도 좋다

차가운 이성의 시대에서

by 강유랑

눈물이 많은 사람이 좋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눈물이 내 마음을 씻어 내리는 것이 좋다.

누군가 날 위해 울어준다는 것이 좋다.


슬픈 영화를 보고 흘리는 눈물도 좋지만,

기뻐서 흘리는 눈물은 아름답다.

슬픔 다 씻어버리는 눈물이 좋다.

기쁨의 감격을 아름답게 만드는 눈물이 좋다.


눈물이 많은 사람이 좋다.

기쁨도 슬픔도 다 느끼는 당신이 좋다.

눈물은 절대 나약하지 않다.

그러니 그대 울어도 좋다.


슬픈 영화보다는 밝은 영화가 제 취향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일을 부끄럽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왜 슬픔이 싫었을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전 ‘슬픔’이라는 감정이 제 삶을 지배할까 두려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성공에 대해, 강해지는 것에 대한 묘한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는 것은 나약하다.’라고 스스로를 세뇌했습니다. 특히, 남자의 눈물은 이성에게도, 동성에게도 효과적인 방안이 아니라는 글을 보며 이것이 내 인생에 필요 없다는 확신을 했습니다. 그렇게, 슬프지 않은 척, 태연한 척, 슬픔이라는 감정을 외면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강해지고 싶다면서 두려워서 피하는 것이죠.

무던한 척하는 것에는 꽤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어차피 누구도 나를 돕지 않는다는 생각에, 때로는 남보다도 차갑게 나를 대하기도 했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필요가 있을까요. 행동경제학, AI가 발전할수록 수많은 책에서는 인간이 감정의 동물이기에 판단에 불리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진짜 소통을 갈구한다는 점도 참 아이러니합니다. 진짜 소통은 감정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과정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차에서 음악을 듣던 중이었는데 마음에 공감이 얼마나 크게 되던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영화관인데 다른 사람들도 다 눈물을 흘리더군요. 그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이 위대한 감정을 만났습니다. 분노도, 슬픔도, 괴로움도. 우리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구나. 진짜 울어본 사람만이 우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 감정을 제대로 체험해야 그것들이 내 안에서 막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감정에 솔직한가요. 싫으면 싫다고, 슬프면 펑펑 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참는 이 감정이 우리의 내면을 얼마나 힘들게 할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울고, 화도 내면서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 감정이 주는 그 축복의 시간을 통해 저는 저 자신을 진정으로 아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운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눈물을 불러옵니다. 모든 아픔과 슬픔이 모든 것을 씻어내는 그런 아름다운 하루이길 바랍니다. 아, 문학 작품이나 영화, 음악 앞에 우리가 우는 일도 작가를 위해 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정성껏 준비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즐겼으면 합니다. 당신은 당신 감정의 주인입니다. 감정에 잡아먹히거나 도망가지 말고, 당신 안에서 충분히, 아주 충분히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울어도 좋습니다. 감정을 느끼고 풀어낼 때, 당신은 그것의 주인이니까요.’


- 세상 가장 귀한 당신의 손에 ‘강유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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