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by 이진무


나는 화가예요.

침묵 속에 고개 숙인 채

오솔길을 걷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았어요.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가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당신의 옷깃에 초록빛이 물든 것 같았어요.


나의 차가운 시선에

허수아비처럼 서 있던 당신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초록빛이라니.

나는 의아했어요, 슬픔이 초록색일 수 있을까?


만약 슬픔을 초록색으로 그린다면

모두 깔깔거릴 거예요.

하늘도 땅도 바람도 심지어 꽃과 나무도

웃을 거예요.


그러니 얘기해줘요.

당신의 슬픔이 무슨 색인지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회색인가요

어두운 밤하늘처럼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검은색인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기쁨은 무슨 색인가요?

함께 거닐었던 거리처럼

밝은 노란색일까요?

무지개처럼 일곱 가지 색일까요?


세상은 변하고 색깔도 변해요.

검은 흙 속에서 초록 새싹이 돋아나고

초록 잎사귀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듯

슬픔과 기쁨은 서로 뒤엉켜 찾아와요.


당신은 떠났지만 슬프지만은 않아요.

당신을 보냈지만 분명 다른 길이 펼쳐질 거예요.

그것이 기쁨일지 슬픔일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나는 화가예요.

이 모든 걸 화폭에 담고 싶지만

너무 모호해서

붓을 든 채 그냥 서 있어요.


삶은 무슨 색일까요?




가끔 산을 오릅니다. 같은 길인데도 어떤 날은 환상적으로 아름답습니다.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까지 모두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빛나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날은 그 모든 것들이 쓰레기 같은 장애물로만 보입니다.

발목을 잡는 돌부리,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가파른 경사.

왜 이 고생을 하나 싶습니다.


일출.jpeg


설악산 일출을 보러 간 날도 그랬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어둠 속을 헤치며 올라갔지만,

정작 해가 떠오를 때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출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출은 거기 있었지만 제 마음을 덮은 우울함과 기분 나쁨이 시야를 가렸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면서도 저는 그저 텅 빈 마음으로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보는지보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요.


화가는 그림을 그립니다.

똑같은 풍경을 보고 어떤 화가는 밝고 경쾌하게, 어떤 화가는 어둡고 무겁게 그립니다.

같은 화가라도 어제와 오늘 그린 그림이 다릅니다.

똑같은 사과 하나를 놓고 그려도 그 사과는 매번 다른 색을 띱니다.

그것은 사과가 달라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서입니다.


사과그리기.jpeg


삶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어제의 기쁨이 오늘의 슬픔이 되기도 하고,

검은 흙 속에서 초록 새싹이 돋아나듯 슬픔 속에서 다시 기쁨이 싹트기도 합니다.

또한 초록 잎사귀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듯,

기쁨 역시 언젠가는 그늘을 만들기도 합니다.


검정과 초록.jpeg


그러면 삶은 무슨 색일까요?

아마도 삶은 하나의 색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검정 속에 초록이 있고, 초록 속에 검정이 있듯이,

슬픔 속에 기쁨이 있고 기쁨 속에 슬픔이 있는 것.

그 모든 색이 뒤섞여 매 순간, 다르게 보이는 것. 그것이 삶이 아닐까요.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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