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셔츠

by 고양이

무슨 변덕이었는지 친누나가 자신의 셔츠를 입어보라고 했다.

누나의 체취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소매 끝은 손등을 반쯤 덮었고 어설프게 맨 넥타이는 목등뼈 언저리에서 겉돌았다.

긴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다.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흉내 내는 배우 같았으나 그 헐거움이 주는 해방감이 싫지 않아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별관 건물을 빠져나와 운동장이라는 거대한 빈칸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다.

2층과 3층, 나란히 늘어선 창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열리기 시작했다. 창틀마다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얼굴들. 위에서 쏟아지는 웃음소리는 운동장의 노란 흙먼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조롱이라기엔 음절이 너무 화창했고, 멸시라기엔 시선의 온도가 높았다.

오히려 그건 일상의 균열을 발견한 이들이 보내는 일종의 환대같았다.

나는 그 시선들의 중심을 가로지르며 내가 입은 것이 셔츠가 아니라 어떤 근사한 배역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때, 눈치 없는 바람 하나가 정면에서 달려와 내 목에 걸린 넥타이를 왼쪽 어깨 너머로 거칠게 날려 보냈다. 연출된 적 없는 이 우연한 프레임 안에서 나는 비로소 완벽한 이방인이 되었다.

왼쪽으로 펄럭이는 실크 조각 하나가 그날의 분위기를 결정지었다.


그날 이후.

내 책상 위에는 포장지 끝이 조금 구겨진 초코파이나 빵 같은 것들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셔츠 주인이 누구인지 묻지 않는, 오직 그날의 '왼쪽으로 흐르는 바람'에 화답하는 수줍은 문장들이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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