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사랑이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된 뒤에야 가능한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이 버겁고,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조차 쉽지 않을 때일수록 더 놓치고 싶지 않은 어떤 태도에 가깝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종종 사랑을 여유의 산물처럼 말한다.
일이 잘 풀리고, 마음이 안정되고, 하루를 돌아볼 틈이 생겼을 때 비로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그 말이 아주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삶이 정돈되어 있을수록 사람은 조금 더 부드럽게 반응할 수 있고, 누군가를 더 잘 돌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반대의 순간들에서 사랑을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마음은 자꾸만 좁아지고, 하루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 말이다.
그럴수록 사람은 자기 안으로 숨어들기 쉽다. 내 걱정과 내 불안, 내 생존에만 몰두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와중에도 누군가를 생각하고 마음을 건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나에게 사랑은 그런 순간에 드러나는 선택에 가깝다.
내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인간적인 마음까지 닫아버리지 않으려는 선택.
오랫동안 나는 사랑을 그렇게 이해해왔다.
사랑은 단지 설렘이나 위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태도라고.
힘든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다정함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래서 사랑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기 전에, 한 인간이 스스로를 길러내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을 오래 생각할수록, 나는 그 믿음도 조금은 조심해서 바라보게 되었다.
사랑이 나를 성장시킬 수는 있어도, 사랑의 중심에 언제나 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때때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 끝내 다정하려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도 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상대보다 내가 더 선명해질 때다.
내가 얼마나 진심인지, 얼마나 깊은 사람인지, 얼마나 끝까지 다정할 수 있는지가 사랑의 중심이 되어버리면, 상대는 쉽게 내 서사를 빛내는 배경이 된다.
그때 사랑은 조용히 방향을 바꾼다.
타인을 향하던 마음이 결국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랑을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사랑은 나를 완성하는 서사가 아니라, 내 바깥의 한 사람을 실제로 만나는 일이라고.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을 만나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 기대와 다르더라도 보게 되고, 불편해도 배우게 되고, 내 서사에 잘 들어맞지 않더라도 그 사람 자체를 받아들이려는 일. 사랑은 누군가를 통해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감정이 아니라, 내 바깥의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오래 바라보는 일에 더 가깝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어쩌면 진짜 사랑은 결국 한 사람을 조금 더 넓고 깊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는 목적이 아니라 결과여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성장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진심으로 만나려는 과정 속에서 내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 순서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나 자신을 지우는 일은 아니다.
사랑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자기돌봄 역시 필요하다. 내가 나를 잃은 채 타인에게만 마음을 쏟으려 한다면, 그 마음도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외로움과 자기중심성, 다정함과 자기검열, 관계와 거리, 그리고 끝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함께 말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내가 끝내 믿고 싶은 사랑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증명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한 사람을 실제로 만나게 하는 사랑. 여유가 있어서 가능한 마음이 아니라, 여유가 없어도 끝내 포기하고 싶지 않은 태도. 나를 더 빛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내 너를 만나기 위해 선택하는 마음.
이 이야기는 아마 그 마음에 대해 오래 더듬어보려는 기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