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법을 배우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나는 이 말을 믿었다. 아니, 믿었다기보다 그 말 뒤에 숨어 있었다.
나는 도전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하면, 머릿속에서 수백 가지의 실패 시나리오가 재생됐다. "망하면 어쩌지?"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그럴 줄 알았다고, 역시 안 된다고 하겠지." 사실 두려운 건 실패 그 자체가 아니었다. 실패 후의 평가, 그때의 나 자신을 견디는 일이었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으면 도전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준비하고 나서." "이 정도면 아직 부족해." 그렇게 미루다 보면,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또 한 해가 지나갔다. 그런데 다들 알잖아요. 완벽하게 준비된 도전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냥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는 걸. 나도 그걸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가슴은 늘 한 발짝 늦었다.
2020년,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 공모전. '일 외의 일'에 도전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3개월 동안 야근 후에도 새벽까지 자료를 뒤지고, 주말마다 카페에서 팀원들과 토론했다. 제출 직전까지도 불안했다. '이게 맞나?' '다른 팀은 더 잘했겠지?' 하지만 일단 제출 버튼을 눌렀다. 떨리는 손으로. 결과는 우수상. 기뻤다. 정말 기뻤다. 그런데... 너무 아쉬웠다. 시상식장에서 최우수상 팀의 발표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 혼잣말을 했다. "다음엔 꼭 최우수상이다." 그 다짐 하나로 1년을 버텼다.
2021년, 다시 도전했다. 이번엔 더 열심히 했다. 전년도 최우수상 작품들을 분석했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했다. 밤을 새워가며 완성도를 높였다. 이번엔 진짜 자신 있었다. 주변에서는 전부 최우수상이라고 말을 했다. 나도 그랬다. 자기 검열이 심한 내가 이 정도로 생각했으니 얼마나 자신이 있었을까? 하지만, 결과는... 또 우수상. 주변에선 "이번엔 진짜 최우수상 각이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나는 스스로를 누구보다 냉정하게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래, 이번엔 진짜 잘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결과가 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로도 싫었다. "그래도 대단하잖아." "두 번 연속 우수상이면 진짜 잘한 거야." 그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이상하게도 더 아팠다. 위로를 받는 순간, 내 안의 패배감이 또렷해졌다. 나는 위로가 아니라 최우수상이 필요했다.
2022년, 세 번째 도전을 했다. 이쯤 되면 영화나 드라마 같으면 결말은 뻔하다. "드디어 최우수상 수상!" 그 장면을 수백 번 상상했다. 시상식에서 무대에 오르는 나, 트로피를 받는 나, 동료들에게 축하받는 나.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본선 탈락. 결과 발표를 보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진짜 뭘까? 굿이라도 해야 하나?" 내 인생은 시나리오 작가가 잠시 까먹은 조연 같았다.
며칠간 멍했다. 그동안 쏟은 시간, 노력, 기대 - 전부 허공으로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했다.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르지 못할 나무였던 거다. 애초에 쳐다보지 말았어야 했다. 다음 해는 도전하지 않았다. "올해는 좀 쉬어야겠다."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도망친 거였다. 또 떨어지는 게 무서웠다. 네 번째 실패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공모전 공고가 떴을 때, 괜히 다른 일에 바빴던 척했다. 나는 그냥 겁이 났다.
2025년, 또다시 도전했다. 네 번째 도전. 내 마음 스스로 "아직도 하냐", "집착이 아닐까?"라는 마음의 목소리가 들였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왜 이러고 있지?' 결과는... 본선 탈락. 발표를 보는 순간, 한숨이 나왔다. "또야?" 하지만 이번엔 놀랍게도 후회는 없었다. 비록 결과는 없지만, 도전하는 동안의 나 자신은 꽤 멋있었다.
4년. 우수상 2번, 본선 탈락 2번. 최우수상은 한 번도 못 받았다. 겉으로 보면 실패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그 도전 동안, 나는 정말 많이 배웠다. 프로젝트 기획 능력, 발표 스킬, 팀워크, 시간 관리.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패해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떨어져도 세상은 계속 돌아갔고 나는 여전히 직장에 출근했고 나는 살아있었다. 실패가 나를 정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공모전 경험이 이상하게도 다른 곳에서 빛을 발했다. 연수 강의 제안이 들어왔고, 프로젝트 기획 자문 요청도 왔다. 최우수상은 못 받았지만, 나는 분명 성장하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마음이었다. 예전엔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못 했는데, 이젠 일단 해보고 본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걸, 머리가 아니라 몸이 알게 됐다.
의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 4년 동안 같은 공모전에 네 번 떨어졌어요." "그래도 네 번 도전하셨네요."
의사의 말에 멈칫했다. 그렇네. 나는 네 번이나 도전했다. 떨어질 줄 알면서도, 또 아플 줄 알면서도. 그게 대단한 거였나? "선생님, 그게 집착 아닐까요?" "집착과 끈기의 차이가 뭘까요? 그게 당신을 망가뜨렸나요, 아니면 성장시켰나요?" 그 질문에 답은 명확했다. 나는 성장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은 어쩌면 넘어질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만든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그런 말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도, 한 번쯤은 쳐다보자. 아니 가능하면 두세 번쯤은 매달려보자. 네 번도 괜찮다.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때의 바람과 하늘은 분명 내 기억 속에 남을 테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처음엔 그 말이 위로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위로가 아니라 진실이었다.
나는 최우수상을 받지 못했지만, 도전하는 법을 배웠다. 실패를 견디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오늘도 누군가 물었다. "내년에도 도전해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다. 아마도 또 할 것 같다. 떨어지더라도. 에라이, 5번째쯤이야. 불안장애를 가진 사람이 5년간 다섯 번의 도전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 아닐까. 나는 오늘도 나무를 쳐다본다. 그리고 내일도, 아마 모레도.
"성공은 실패에서 실패로 옮겨가되 열정을 잃지 않는 능력이다." - 윈스턴 처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