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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은 예쁜데 마음은 시들어요

부드러운 바람의 무서움

by 라디

가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말이 살찐다는 계절이라는데… 불안장애에게는 말이 아니라 불안이 살이 찐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계절. 사람들은 예쁘다며 사진 찍고, 단풍 구경 간다고 부산한데, 나는 매년 이맘때면 조용히 긴장한다. 가을은 내게 계절이 아니라 경보음이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경고등 같은 것.


10월 첫날, 달력을 넘기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 또 왔구나.' 여름이 끝나가는 공기. 아침저녁으로 시원해진 바람. 사람들은 "날씨 좋네요"라고 하지만, 나는 그 바람이 무섭다. 마치 내 마음의 온도까지 떨어뜨리는 것 같아서. 작년에도 그랬다. 재작년에도 그전에도. 10월만 되면 이유 없이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더 힘들고, 출근길이 더 멀게 느껴진다. '왜 유독 가을만 되면 이럴까?' 처음엔 몰랐다. 그냥 우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매년 반복되니 이제는 안다. 나에게 가을은 '계절성 우울'이 시작되는 시간이라는 걸.


"요즘 어떠세요?" 지난주 진료 때 의사가 물었다. "음… 최근엔 좀 괜찮았어요. 근데…" 말을 흐렸다. 구체적으로 뭐가 안 좋은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냥 전반적으로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 "약 용량은 그대로 할게요."

의사가 처방전을 끊으며 말했다. "지금 시기에는 원래 많은 분들이 예민해져요. 일반적인 사람들도 다운되는 계절이거든요. 특히 10월부터 11월까지는요." "아… 저만 그런 게 아니구나." "네, 계절성 우울이라고 해서 가을, 겨울에 유독 증상이 심해지는 분들이 많아요. 일조량이 줄어들고, 세로토닌 분비가 감소하면서 생기는 거죠."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마음이 묘해졌다. 계절 하나 바뀌었다고 마음이 흔들리고 의사는 약 처방을 고려해야 하고 사람들은 괜히 우울해지고. 이런 걸 보면 인간은 정말 작고 자연은 정말 거대하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또 실감한다.


첫 진료도 가을이었다. 가을은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유난히 힘든 계절이다. 내가 처음 병원 문을 두드렸던 것도 가을이었다. 그때의 공기는 상쾌했는데, 내 속은 더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날씨는 좋은데 이유 없이 더 슬픈 것. 빛은 많은데 마음은 더 어두워지는 것.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길을 걷다가 은행잎이 떨어지는 걸 보면,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예쁜데 슬펐다. 아름다운데 쓸쓸했다. "나도 저렇게 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참, 낙엽 보고 우는 사람이 어디 있나.

가을의 바람은 차갑지 않다. 오히려 부드럽다. 근데 그 부드러움 때문에 더 무섭다. 불안도 그렇다. 갑자기 확 덮치지 않는다. 조용히, 살짝 귓가를 스치듯 들어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음 한가운데 눌러앉는다. 단풍도 그렇지 않은가. 처음엔 조금 노랗게 조금 붉게 변하더니 어느새 숲 전체가 물들어버린다. 불안도 그렇게 퍼진다. '이 정도면 괜찮아' 하고 넘겼던 마음이 어느새 온몸을 칠해버린다.


가을 햇빛은 예쁘지만 그림자는 길어진다. 내 불안도 햇빛보다 그림자를 닮았다. 조금만 마음이 흔들려도 길게 늘어져 따라붙는다. 오후 4시만 되면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내 키보다 두 배는 길어진다. 불안도 그렇다. 작은 일이 두 배, 세 배로 커져 보인다.


가을만 되면 잠이 많아진다. 알람이 울려도 일어나기 싫다. 이불속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니, 정확히는 세상이 더 차갑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괜히 예전 일들이 떠오른다. 작년 가을에 뭐 했더라. 재작년 가을엔 누구랑 만났지. 3년 전 가을엔… 후회와 그리움이 뒤섞인 기억들이 낙엽처럼 흩날린다. 별일 아닌 것에 심장이 살짝 빠르게 뛴다.


"오늘 괜찮았나?" "아까 그 말 이상하게 들렸을까?" "내일 회의 자료 부족한 거 아닐까?" 마치 가을이 "그동안 숨겨놓은 감정, 이제 꺼낼 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가을이 두렵다. 내 마음의 틈을 잘 알고, 그 틈을 부드럽게 벌리는 계절이라서.


하지만 동시에… 가을은 '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계절이기도 하다. 초록이 한순간에 빨간색이 되는 걸 보면 '아, 나도 조금은 변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나무가 잎을 떨구고도 다시 봄을 맞이하듯, 나도 이 계절을 지나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오늘 아침, 출근길에 은행나무를 봤다. 노란 잎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예전 같으면 '나도 저렇게 떨어지는 건 아닐까' 했을 텐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저 나무도 내년 봄엔 다시 초록색이겠지.' 오늘의 나는 괜찮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출근은 한다. 여전히 밥을 먹고 여전히 누군가의 메시지에 답을 하고 여전히 또 하루를 살아낸다. 가을은 무섭지만, 나는 가을을 지나가 본 사람이다. 그리고 아마 올해도 내년에도 또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불안과 함께, 약과 함께, 그래도 계속.


가을을 두려워하는 마음까지 포함해서, 그게 지금의 나니까. 에라이, 가을쯤이야. 매년 잘 지내고 있잖아.



"계절이 바뀌듯, 감정도 바뀐다. 영원한 겨울은 없다." - 퍼시 비시 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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