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은 혼자
나는 스스로를 한 단어로 설명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나는 모순이다."
MBTI는 INFP. 전형적으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조용한 방에서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사람. 사람 많은 자리에서는 기운이 빠지고, 약속이 취소되면 은근히 기뻐하는 타입. 그런 내가 관계중독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관계중독. 참 이상한 말이다. 중독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뭐든지 어감이 좋지 않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웠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는 정반대로, 나는 극단으로 기울어져 있는 셈이었다. 집을 좋아하는 INFP가 관계중독이라니— 누가 봐도 모순이고, 나 스스로 봐도 모순이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관계중독이 될 수 있나요?" 의사는 잠시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중독이라고 해서 항상 사람 옆에 붙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물었다. "네?" "관계중독은 '관계' 자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그 평가에 삶 전체가 흔들리는 거죠."
집 밖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건 싫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보낸 메시지의 말투 하나하나를 몇 번씩 다시 읽는다. "이 표현이 기분 나쁘게 들렸을까?" "이모티콘을 하나 더 넣을걸"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혼자 밥 먹으면 "왜 안 와요?" 하는 동료의 말에 죄책감을 느낀다. 사람은 피하지만, 타인의 시선은 놓지 못하는 삶. 그게 바로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으니까.
"결국 자존감 문제예요." 의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한동안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유행이었다. 서점에는 자존감 향상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도 그중 몇 권을 들고 와 열심히 읽었다. 세 줄 요약하면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남과 비교하지 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네가 너의 기준이 되어라."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30년 넘게 남의 시선에 맞춰 살아온 내가, 책 한 권 읽었다고 바뀌겠나? 남이 나를 어떻게 볼지 먼저 생각하는 습관은 이미 근육처럼 길러져 있었다. 다리를 꼬는 습관처럼 무의식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변화는 작은 데서 시작됐다. 어느 날 점심시간, 휴게실에서 동료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다들 최근 본 드라마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억지로 맞장구를 치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다음 날부터 점심을 혼자 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했다. 식당에 혼자 앉아 밥을 먹는데, 주변 시선이 신경 쓰였다. '저 사람 친구 없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며칠 지나니 편했다.
아무 말도 안 해도 됐다. 웃지 않아도 됐다. 드라마를 안 봐도 됐다. 그냥 밥만 먹으면 됐다. 45분이라는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었다. "요즘 점심 왜 혼자 먹어요?" 동료가 물었다. 예전 같으면 "아, 그냥 요즘 바빠서요" 하고 변명했을 텐데, 그날은 솔직하게 말했다. "혼자 먹는 게 편해서요." 동료는 의외로 "아, 그럴 수도 있죠" 하고 넘어갔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뒷담화도 없었다. 다음 날도 회식 제안이 왔다. 에라이, 괜히 걱정했네.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외로움과 혼자 있는 게 뭐가 다른가요?" "왜 그걸 물어보세요?" "저 요즘 혼자 있는데, 외롭지는 않거든요. 근데 이게 정상인가 싶어서요."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외로움은 감정이고, 혼자는 상태예요." "...?"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고, 사람들과 있어도 외로울 수 있어요. 지금은 어떠세요?" "혼자 있는데 편해요." "그럼 그게 답이죠. 외롭지 않은 혼자." 그 말에 뭔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관계중독이지만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모순 같지만 둘은 다른 축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사람일 뿐.
나는 집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관계중독이다. 둘 다 진실이다. 둘 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둘 다 내가 버텨온 증거다. 오늘도 점심은 혼자 먹었다. 휴게실에서는 동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예전 같으면 '나도 거기 있어야 하나?' 하고 불안했을 텐데, 오늘은 그냥 괜찮았다. 저 사람들도 즐겁고 나도 편하고.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는 모순이라는 단어가 예전만큼 싫지 않다.
인간은 원래 모순 덩어리니까. 모순을 없애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모순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관계중독이지만 혼자 밥 먹는 사람. 사람이 좋지만 사람이 피곤한 사람. 외롭지 않게 혼자 있는 법을 배우는 사람.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
"혼자 있는 것과 외로운 것은 다르다. 나 자신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혼자는 가장 풍요로운 시간이다." - 폴 틸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