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통을 서랍 깊숙이
약을 끊었습니다.
1년 동안 꾸준히 먹던 불안장애 약을 그냥… 끊어버렸다. 물론 의사와는 상의되지 않은 것이다. 말하면 뭐라고 하겠지. "그렇게 갑자기 중단하면 안 돼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듣기 싫었다.
점점 불안이 잦아들고, 심장이 쓸데없이 뛰는 순간들이 조금 줄어들고, 머릿속 잡음이 잦아들 무렵이었다. '나 이제 괜찮은 거 아냐?' 아침에 일어나도 예전만큼 무겁지 않았다. 출근길이 덜 막막했다. 동료와의 대화에서 "혹시 내 말이 이상했나?" 하고 곱씹는 횟수도 줄었다. 약 덕분인지 시간이 지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아지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간사하게도 약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말 깜빡했다. 아침에 정신없이 준비하다가 "아, 약!" 하고 생각났지만 이미 현관문을 나선 뒤였다. '에이, 오늘 하루쯤이야.' 그날은 별일 없었다. 세상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불안이 확 밀려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다음 날도. "내일 꼭 먹어야지." 자기 전에 생각했지만 피곤해서 그냥 잠들었다. 그러다 한 번은 깜빡하고, 두 번째는 일부러 미뤘고, 세 번째쯤 되자 나도 모르게 약통을 보지 않았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나, 괜찮아진 걸까?" 잠깐 그런 희망이 들었다. 약 없이도 평범하게 지내는 며칠이 이어지니 스스로가 조금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도 이제 정상인이 된 거 아냐?' 약통을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보이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실제로도 잊고 지냈다. 회의 시간에도 전보다 덜 떨렸고 민원 전화도 조금 덜 무서웠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괜찮았으니까.
하지만 2주가 지나자 미세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변화들이었다. 처음엔 몰랐다. 그냥 '오늘 컨디션이 안 좋나 보다' 정도로 넘겼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문장 사이사이에 비교가 끼어들었다. "○○ 선생님은 벌써 프로젝트 끝냈대." '나는 아직도 절반밖에 못 했는데.' "△△는 요즘 강의 많이 다니더라." '나는 왜 이렇게 안 불려줄까.'
남의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맴돌았다. "오늘 좀 피곤해 보여요." 동료의 무심한 한마디에 하루 종일 신경 쓰였다. '내가 그렇게 안 좋아 보였나? 표정 관리를 못 한 건가?' 거울을 볼 때마다 자존감이 바닥을 긁고 있었다. '나 왜 이렇게 생겼지. 얼굴도 붓고, 표정도 어둡고.'
3주가 되자 확실해졌다. 아… 다시 돌아가는구나. 예전의 그 못난 나로. 다른 사람의 기준에 목숨 걸고 남의 평가에 마음이 휘청이고 작은 실수에도 나를 벌하던 그 시절로. 몸이 아닌 마음이 먼저 기억하는 퇴행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그제야 솔직해졌다. 나는 약이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 약을 끊고 싶은 사람이었다. 두 개는 완전히 다른 말인데 나는 그걸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약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상인처럼, 평범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는 사람처럼.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여전히 약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밤에 서랍을 열었다. 약통이 거기 있었다. 먼지가 살짝 쌓여 있었다. '이러다 정말 약을 평생 먹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마다 묘하게 서글프고 묘하게 안도된다. 어쩌면 '평생'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절망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붙잡아주기도 하니까. 당뇨병 환자는 평생 인슐린을 맞는다. 고혈압 환자는 평생 혈압약을 먹는다. 나는 평생 불안장애 약을 먹는다. 뭐가 다른가.
약통을 열었다. 물 한 잔을 따랐다. 약을 입에 넣고 삼키는 순간,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돌아왔구나.' 내가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의사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다음 진료 때 말해야지. 의사가 어떤 말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감내해야지, 내 잘못인 것을. 나는 다시 약을 손에 쥔다. 죽기 싫어서. 살아보고 싶어서. 내일의 내가 오늘보다 조금 더 괜찮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아직 완치되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 완치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안장애는 감기처럼 낫는 게 아니라 당뇨처럼 관리하는 병이라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땐 절망스러웠다. '평생을?'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완치되지 않아도 괜찮다. 관리하면서 살면 된다. 약을 먹으면서도 웃을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오늘 아침, 약을 먹고 출근했다. 어제보다 조금 마음이 가벼웠다. 동료의 인사에 웃으며 답할 수 있었다.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아.' 그 정도면 됐다. 나는 약을 끊었다가 다시 먹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먹을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건 내가 나를 돌보는 방법이니까. 에라이, 약쯤이야. 먹으면서 사는 게 안 먹고 죽는 것보다 낫지. 불안하지만, 오늘도 약을 먹고살아본다.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다." - 데미 로바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