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1. 28.
변화의 소용돌이는 어디에나 있다. 개인의 일상에도 변화의 물결이 있고, 개인이 모여 사는 사회, 즉 국가, 더 나아가 세계 어디에나 변화는 물결치듯 드러난다. 너무 빠르게 바뀌는 세상 탓에 머리가 어지럽다. 무엇이 좋은 건지, 무엇이 정상인지 혼란에 혼란이 겹쳐 카오스인지 하모니인지 알 수가 없다. 일상에는 이 변화의 흐름에 따라 새로움이 등장하고 낡음으로 퇴색해 사라지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나는 글을 쓴다. 나의 오감으로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반응하여 내부의 내 마음이 밖으로 드러난다. 또 외부 자극에 대한 내부 심연의 울림을 글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한다. 비록 능력이 출중하지 못해 느낌 그대로 표현함에 서툴지만 말이다. 외부 세계의 급속한 변화는 나의 내부 마음에도 적잖은 영향이 있다. 에이아이라는 인공두뇌의 일반화는 사람의 일을 대신한다. 내가 글을 쓰지 않아도 인공두뇌는 나를 대신하여 글을 쓰고 나 아닌 내가 되어 진실을 왜곡한다. 우리는 왜곡된 진실조차 참으로 알고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변화의 물결을 거부할 수 없는 거버넌스에 우리는 이미 함께 하고 있다.
손안에 든 에이아이 기기인 폰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다. 나 역시 폰으로 종이 아닌 종이에 글을 쓰고 저장하고 책이 아닌 책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비록 몇 안 되는 사람이 나의 글을 만나서 읽고, 느낌을 얻고 또 좋아요 하지만 과거에는 출판하지 않고는 엄두도 못 낼 일이 지금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새 세상이 열리면서, 낡은 것이 빛바래 사라지는 한 장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벌써 새로움이 생겨난다. 어제의 일은 이미 까마득한 과거로 흘러가 기억조차 희미하다. 우리는 망각하고도 망각한 줄 모르고 지나간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빠르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나도 모르게. 우리가 변화를 인식한 순간에 벌써 과거가 되어 우리의 경험, 우리가 만난 것, 등등이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
변화의 소용돌이는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기도 한다. 낡고 오래된 것이 사라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새 발명품으로 인해 원하는 때, 원하는 곳으로 불러올 수도 있다. 비록 이미지일 뿐이라도 말이다. 상상이 현실이 되고, 과거의 이루지 못했던 꿈이 영상 속에서 현실처럼 내게 다가와 복원된다. 현실과 상상이 혼재되어 있다. 에이아이의 세계는 적어도 꿈을 꿈으로 두지 않고 현실이 되어 착각 아닌 착각으로 우리를 만난다. 오감으로 얻은 외부 자극이 나의 생각을 타고 내부 깊숙한 곳에 머무는 마음과 소통하여 쓰이는 나의 글이 에이아이의 글과 혼돈되지 않길 바라는 고뇌를 나는 어이해야 할까? 일상은 나에게 끊임없이 이 번민을 던진다.
나는 종이 위에 메모한다. 일상에서 기억해야 할 것을 아직도 메모지에 메모하고, 메모한 것을 확인하며 하루를 보낸다. 때로는 달력을 쳐다보며 내일, 한 주일, 또 한 달의 일상을 윤곽 잡고 살아간다. 하지만 엠지세대는 다르다. 손 안의 폰에서 스케줄을 확인하고, 메모를 남긴다. 폰과 몸이 하나이다. 폰으로 즐기고, 일하고, 소통하며 그들만의 세계를 새로이 만들고 그 속에서 일상을 살고 있다. 종이에 메모하는 나는 낡음이 되어 사라지기 일보직전이다. 식사하러 식당에 가니, 종업원 대신에 키오스크가 나를 반긴다. 기계에 서툰 나는 주문도 서툴어 입맛이 없다.
아날로그의 감수성이 그립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쓰레기통으로 폐기처분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아날로그의 추억이 솔솔 살아난다. 7080 카페를 들러 엘피판 음악을 감상하고, 폰 없이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낡은 노포를 찾아 차를 마시며 향수에 젖어보고 싶다. 소위 낭만을 즐기고 싶다는 의미이다. 새것으로 인해 빛이 바랜 낡은 것에서 마음의 안식을 구하고, 포근하고 구수한 행복을 얻는다. 디지털 세계 속에서 아날로그의 감수성으로 원고지가 아닌 가상공간에 시를 쓰고, 수필을 써서 나를 드러내고 읽어주길 바라고 있다. 글이란 것이 출판되는 순간에 작가의 생각, 마음 등을 포함하여 자신의 민낯이 다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부끄럽기까지 한데도 가상의 공간에서는 현실의 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미명 하의 익명성으로 글을 드러낸다. 하지만 나에게 글은 가상 속에서도 참이라는 마음을 담으려 손가락을 움직인다. 에이아이가 쓰는 글이 아니고 검지로 똑딱똑딱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을 심는다. 낡은 것이 되어 사라지기 전에 기억을 더듬으면서 사실에 근접한 참을 찾는다.
문화지체란 말이 있다. 물질문화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정신문화의 느린 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은 정보지체, 변화지체라는 말로 혁명적 발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을 언급하고 싶다. 지역, 계층, 연령, 성 등 다양한 부류에 따라 정보나 변화를 수용하고 접하는 차이로 말미암아 일상의 부적응이 나타나 생활이나 삶의 불평등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 생각만 하지 말자. 차이로 인한 불평등이 아닌 다양성을 지닌 삶의 모습이라면, 새로움과 낡음의 융합으로 또 다른 새로움을 보여주는 변화일 수 있다.
새로움에 밀려나는 낡은 것이 사라짐이 아닌 새로운 융합이길 바라면서 7080 카페를 찾는다. 디지털 음악이 아날로그 음악을 대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날로그 음악이 역사의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자책이 나온다고 종이에 인쇄된 책이 사라지지 않듯이 말이다. 서로 공존하면서 엘피판 노래는 노래 대로, 잉크 냄새 풍기는 인쇄된 책은 책대로 청자를 만나고, 독자를 만난다. 향수로 옛 노래를 감상하고, 책장에 장식하기 위해 책을 찾는 것만은 아니다. 기억을 더듬고 추억 속에 숨 쉬는 살아 있는 농축된 일상으로 삶의 의미를 보다 올곧게 찾으려 격변 속에 갑자기 사라지고 퇴색된 것들을 소환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렇다.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일상에서 체험하면서 사용하고 얻은 결과 혹은 물건들을 되새김질하면서 회상한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쌓이면 변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했던 것들도 낡고, 사용기한이 다하여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기 마련이다. 새로움으로 인해 유효기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밀려날 수밖에 없는 새것이 퇴색되기보다 함께 공존하며 또 다른 새로운 융합으로 다양성을 인정하면 더 풍요로울 것 같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시간이 지나면 모두 다 낡게 되어 있는 것을 어찌하랴? 다만 너무 빠른 변화로 인해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쓰임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물이 되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밀려오는 다음 세대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사회 뒤편으로 물러나는 늙은 청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시간과 세월을 거스를 수 없듯이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을 우리는 거스를 수 없다. 새로운 것에 밀려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빛이 바랬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자. 시간은 그 빠름에 차이가 있을 뿐 일상의 모든 것을 다 바꾸고 말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