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몸을, 존재의 바탕을 만들어 준 그것!
이 세상에 사랑하는 몸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남녀 간의 사랑을 하지 않고 홀로 있는 사람도 그가 가진 미덕으로 아름다울 수 있으나,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하고 있는 그 순간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투명한 빛이다.
아름다운 몸의 근본은 사랑이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며 아들 딸을 낳았을 때 생명을 낳은 두 사람의 몸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울 것인가. 비록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의 육체는 에로스에 감싸인 채 늙어갈 것이지만. 사랑이 그들의 육체를 감싸고도는 한, 덕과 행복이 인생을 아름다운 빛깔로 채색할 것이다. 죽음이 어느 날 그들의 늙은 육체에서 사랑했던 기억을 빼앗아가 모든 것이 잊힐지라도.
지상에서 사랑하는 육체들은 조금씩 늙어간다. 영원한 젊은 육체로 사랑하며 살 수 없고, 영원한 아름다움 속에서 살 수도 없다. 영원불멸이 불가능한 ‘나’라는 육체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잠깐 누리며 살 수 있을 뿐이다.
어느 먼 날, 육체는 주름투성이와 기미와 검버섯으로 뒤덮여 젊은 날의 탄력적인 피부와 생기가 넘치는 살들을 잃어가 한낱 오장육부를 담은 주머니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늙은 육체는 순식간에 아름다움을 잃겠지만 그러하더라도 추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할머니들의 육체는 젊은 여자들의 아름다운 육체를 초월한 어떤 숭고미에 감싸여 있다. 소녀였고, 처녀였고, 사랑에 빠진 젊은 여자였고, 어머니였던, 그 모든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미래였던 늙은 육체가 품고 있는 이야기는 인간이 창조해 낸 어떤 허구적 이야기보다 위대하다.
지금은 동네에 공중목욕탕이 모두 사라졌지만, 오래전 서울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동안 일요일 새벽마다 언니와 함께 공중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욕탕문을 열고 들어서면 김이 가득 차 희뿌연 욕탕에 벌거벗은 여자들의 육체가 꿈결처럼 어른거렸다. 엄마와 함께 목욕하러 온 어린 소녀의 육체, 열여섯이나 열여덟 살 소녀들의 육체, 스물몇 살, 서른몇 살 정도의 젊은 여성들의 육체, 할머니들의 육체가 붐비는 새벽 목욕탕은 원초적인 공간처럼 아득했다. 그곳에 스물둘이었거나 셋이었거나 스물 넷이었을 적의 내 어린 육체도 있었다.
나는 세숫대야와 플라스틱 의자를 가지고 어디에 앉을지를 두리번거리다가, 방금 한 여자가 목욕을 다 끝내고 일어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벽에 거울이 달린 자리였는데 내 옆에 할머니가 앉아 때를 밀고 있었다. 할머니의 육체는 늘어진 살들과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지만,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처럼 풍요로워 보였다.
나는 물을 끼얹고 한참 동안 거울 속의 내 육체를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젖가슴을 쥐어 보았다. 작은 손안에 젖가슴이 알맞게 들어왔으나, 소녀의 젖가슴처럼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 때쯤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아가씨, 내 등 좀 밀어줘. 아가씨 등도 내가 밀어줄게.”
“네, 밀어 드릴게요.”
할머니가 연두색 수세미를 내밀었다. 나는 받아 들고 할머니의 등을 밀어주는데 할머니께서 이상한 말들을 했다.
“여자는 피부가 좋아야 돼.”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또 여자의 그곳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아가씨, 거기는 향기로워야 하고 소중히 아껴야 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듯 말 듯 어렴풋이 이해했으나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때를 미는 동안 할머니의 축 늘어진 커다란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홀쭉해진 젖가슴. 어린 아들 딸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준 젖가슴. 모유가 풍부했던 그 원초적인 공간을 고향집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었다.
생의 어떤 순간들 속에는 배고픔이 있다. 육체적 배고픔은 밥을 먹으면 채워질 수 있지만, 영혼의 배고픔은 그 무엇으로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내면에서 갈망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으로 채울 수 있겠으나, 그것도 아닌, 알 수 없는 공허가 내면을 지배하며 영혼을 굶주리게 한다면 무엇으로 그 텅 빔을 채울 수 있을 것인가. 아기가 엄마 젖을 물고 빠는 사이 자기도 모르게 잠들며 안식하는 것처럼 텅 빈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젖가슴이며 할머니의 젖가슴과 같은 원초적인 고향집이 필요하다.
고향집이 아름다운 것은 상처받고 굶주리며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배고플 때 엄마 젖을 찾는 아기였다. 누군가 사랑의 아픔으로 우는 육체를 달래며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건너야 할 때, 우는 육체가 그리워하며 찾는 곳도 원초적인 공간이 아닐까. 아픈 기억과 추억, 울음들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줄 것만 같은, 그래서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고향집!
스물두 살 적 내 어린 육체는 점점 둥글어져 갔다. 거울 속의 육체를 바라보는데,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몸에 알맞게 달라붙은 회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강의실에 앉아 있었는데, 자꾸만 볼록 나온 가슴이 티셔츠에 달라붙는 게 신경 쓰였다. 나보다 일곱 살 더 많은 언니는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앞에 앉더니 내 가슴 부위를 쳐다보고 혼자 재미나게 웃으며 말했다.
“너, 가슴이 밥공기 엎어 놓은 것 같다.”
나는 좀 낯부끄러워 할 말을 잃고 배시시 웃었다.
“나도 너 나이 때는 그랬는데.”
타이트한 티셔츠에 가려진 언니의 가슴은 너무 컸다. 언니와 얘기할 때마다 나는 자꾸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난감했다. 언니가 내 가슴을 밥공기라고 이름 붙여준 후, 나는 정말 내 가슴이 그러한가, 집으로 돌아와 늦은 밤에 샤워를 하다가 벗은 몸을 들여다봤다. 밥공기가 맞기는 했다. 둥글둥글해져 있으니 둥근 밥공기다. 그러고 보면 엄마의 젖가슴도 할머니의 젖가슴도 우리들의 밥공기가 아니었던가.
세상에서 가장 풍요롭고 위대한 밥공기! 우리의 몸을, 존재의 바탕을 만들어 준 그것. 애틋한 생명으로 살게 해 준 그것. 그것은 원자들의 조합과 형태로 만들어진 몸 너머의 몸으로 한 세계를 살 찌운 풍부한 양분이다. 요즘은 호적에 등록되지도 못한 채 출산 후 엄마의 젖을 물기도 전에 버려지는 미등록 아기들이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기 적에 엄마의 젖을 물고 빨며 마침내 지적인 생명체로 거듭 자라나 점점 세계의 규모를 확장하며 사람으로 되어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의 엄마들의 젖가슴은 역사적인 밥공기였다. 원자에 불과했던 존재가 사람의 형태를 갖출 수 있도록, 그렇게 사람을 만드는 일에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짜내어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서사를 이어가게 하였던 것. 태어나 맨 처음 맛본 감각의 세계를 느꼈을 뿐,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의 아름다움을 담아 놓은 경이로운 생명의 그릇임을 마침내 사람이 된 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