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 티셔츠
“아빠는 왜 맨날 빨간 옷만 입어?”
우리 집 두 아이가 자주 하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하자면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입사 초기 직장에 후원 물품이 많이 들어왔다. 후원 부서에서는 큰 바자회를 준비했고, 어떤 달에는 책상 앞에 앉는 시간보다 물건을 옮기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때 직장에서 “막일할 때 입으세요”라고 나눠준 작업복이 여러 벌 쌓였다.
품질은 좋았다. 땀도 잘 마르고 가볍고, 운동할 때도 일할 때도 편했다. 집에서도 자주 입다 보니 ‘맨날 입는 옷’이 되어 버렸다. 탁구장에서도 자주 입는다. 아이들 눈에는 늘 같은 옷만 입는 아빠로 보였나 보다.
한 번은 운동하고 집에 오다가 아파트 놀이터에서 친구랑 놀던 딸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반가워서 아이를 불렀더니, 나를 슬며시 피해 버렸다. “빨간 티셔츠 입은 아빠가 창피했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많이 웃었다.
시골 중학교에 다닐 때 일이다. 논밭에서 일하는 부모님들이 많았다. 어쩌다 부모님이 일하던 옷차림 그대로 학교에 나타나면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던 친구들 생각도 났다. 딸아이가 뭐라 한 다음부터 밖에 나갈 때는 다른 옷을 입으려고 한다.
사무실에서 후배 S가 ‘패셔니스타’라면, 나는 ‘패션 테러리스트’다. S는 아무 일이 없는 날에도 결혼식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꾸미고 온다. 잘 차려입고 다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내일은 또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나려나 궁금하기도 하다. 이 친구는 항상 때와 장소에 맞춰 옷 입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내 옷차림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하려나 싶다.
집에도 이런 사람이 하나 산다. 딸아이가 거울 앞에 한번 앉으면 잘 일어나질 않고 옷도 깐깐하게 골라 입는다. 외출할 때도 대충 입고 나가는 법이 없다. 아이돌 가수 한 분 모시고 사는 셈이다.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 옷을 고르는 게 귀찮다. 계절별로 한 두벌만 두고, 편한 옷이 있으면 몇 벌을 더 사서 돌려 입는 편이다. 양말은 어느 순간부터 탁구 양말이 전부이고 집에서 입는 바지는 탁구 반바지뿐이다.
탄자니아에서 아저씨들이 한국 유치원 가방이나 스포츠 가방을 직장에 들고 다니는 모습을 종종 봤다. ‘00 유치원’, ‘00 스포츠’라고 한글이 크게 박힌 가방을 어른이 들고 다니는 모습이 웃겼지만, 알고 보니 그들에게 중요한 건 디자인이 아니라 기능이었다.
탄자니아에서는 아직 시장이 성숙하지 않아서 디자인보다 기능이 우선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나라는 디자인을 넘어 상표까지 따지는 마당에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내 취향도 탄자니아 사람들과 비슷하다. 옷이든, 탁구 라켓이든 쓰임새가 중요하지 디자인까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달리기 복장도 빨간 티셔츠다.
* 다음화는 '몸을 써야 머리가 고생을 덜한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