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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주의자가 엄마가 되기까지

엄마를 향한 마음을 녹인 글쓰기 공모전 도전이야기

by 안영

이 브런치를 시작하기전, 작년 지역에서 하는 시민글쓰기 공모전에 엄마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적어 공모전에 참여했었다. 글쓰기에도 방법이 있고, 그 만의 룰이 있는데 아직 그런건 잘 알지 못하고 그냥 엄마의 이야기를, 내가 비혼주의를 떠들다가 엄마가 되면서 진짜 엄마를 느끼고,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써내려갔고 급하게 응모했었다. 물론 당선되진 못했고, 올해도 다시 글을 다듬어 도전을 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다. 앞뒤 두서없이 뭔가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느껴진다. 다만 계속 도전하고 싶기에 부족해도 응모해 보고있는데 부끄럽기도 하다. 이렇게나 엉망인 글을 내놓는다고? 라고,,,,, 욕하실껀 아닌가 싶기도 해서^^;;

그래서 아주 부끄럽고 부족하지만 브런치에 올려볼까 한다.

다른 많은 작가님들께서 한번 봐주옵시고, 어떤면이 부족한지 어떤부분은 괜찮은지, 어떻게 다듬으면 더 좋을지 많은 의견들을 받아보고싶다. 난 한참 부족한 아마추어임을 알기에 또 많이 배우고 싶다.

부디, 이 글을 읽으신다면 한마디씩 남겨주시길 바래본다.


-----------------------------------------------시민글쓰기 공모전 출품작----------------------------------------------

나는 엄마처럼 살기 싫었다

나는 오랫동안 비혼주의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가족을 위해 기꺼이 나 자신을 지워내는 삶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내게 결혼은 곧 희생이었고, 그 희생의 그림자는 늘 내 엄마의 일생이었다. 엄마처럼, '나'는 없이 오직 가족만을 위해, 조금 더 뾰족하게는 자식만을 위해 존재하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결혼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게 가장 가까운 여성,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 중 가장 가까운 역할 모델이었던 엄마의 삶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불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엄마, 불행해?"라고 물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스물셋의 엄마가 사랑을 알고 결혼했을 리 없다. 농사짓기 싫어 도시 남자에게 시집가고 싶었던 시골 처녀. 그 시절 대부분이 그랬듯이 엄마는 선을 보았고, 그 자리에 운명처럼 아버지가 나타났다. 스물다섯의 아버지는 체격 좋고 인물 좋고 성격까지 시원시원했다. 통영 바닷가 출신인 그는 일찍이 여러 도시를 다니며 일해 꽤 그럴싸한 지식도 가지고 있었다. 몇 번의 만남 후, 아버지는 외갓집으로 인사를 갔고 외삼촌들의 '합격'이라는 외침 속에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시원시원했던 그의 성격은 다혈질의 불꽃이 되었고, 그럴싸했던 지식은 고집불통의 벽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빚은 한가득이었으며, 홀로 계신 시어머니는 성격이 꼿꼿하고 짱짱하셨다. 엄마는 누굴 탓하겠는가! 이미 결혼은 해버렸고, 물릴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출가외인이니 친정에는 더더욱 말도 못 했을 테고. 그렇게 그저, 묵묵히 살아가기 시작했다.

신혼의 단꿈은커녕, 아버지는 일 핑계로 음주가무를 즐기며 늦게 들어왔다. 엄마는 그런 남편 대신 꼿꼿한 시어머니를 모시며 고된 살림을 꾸려왔다. 내가 아는 할머니는 고운 소리를 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손녀인 나에게도 '예쁘다'는 말 한마디 해주신 적 없는 분이었다. 엄마에게는 어떠했을까? 어려운 형편을 본인 스스로도 아셨을 텐데, 꼭 때가 되면 소고기를 드셔야 했고, 돈을 빌려서라도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고, 가고 싶은 곳은 가셔야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고운 소리로 말씀하셨을 리 없고, 엄마는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참고 또 참으셨겠지.

아주 어릴 적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춘기 즈음부터 할머니의 그런 모습들이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난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엄마도 정말 외롭고 힘들고 지쳤을 텐데 단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몰랐다고 하기엔 나는 너무 못된 딸이다. 평생 비혼으로 살았다면, 평생 엄마의 외로움과 서러움, 그리고 여자로서의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겠지.

엄마처럼 살기 싫다며 결혼이 싫다 했던 것은, 사실 비겁한 외침이었다. 진실은 그 깊은 사랑 앞에 나를 온전히 내어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자유롭게 내 자신만 사랑하며, 책임감이라고는 내 몸뚱이 하나만 느끼며 살아가고 싶었던 거다.

그랬던 내게 내새끼가 찾아오면서 비혼주의는 끝이 나고만다. 뱃속에 생명을 품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 존재를 알게 된 순간, 나는 이미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내 자신만 사랑하고 싶다'는 비겁한 외침은 뱃속의 생명을 지키고 싶은 거대한 본능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때 나는 비로소 내 엄마의 삶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여자로서의 자신을 잠시 내려놓고 엄마로서의 삶을 택했기에, 엄마는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임을.

출산 전 조기 진통으로 꽤 오래 입원했을 때, 매일같이 병실을 찾던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새끼 새끼야. 내 새끼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이. 니 엄마지만 내 딸이다." 이 말은 아이가 태어나 자라면서도 종종 들려오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또 엄마에게 볼멘소리를 해대고, 엄마는 웃으며 대답하신다. "애 듣는데 뭐 그런 소리를 하노!" "맞는데 뭐가~! 지도 지 새끼 낳았다고 지 새끼 편만 들면서!"

그래, 엄마는 그런 거였다. 비혼주의를 외치던 나였지만, 결국 나도 엄마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살면서 그토록 보기 싫었던 엄마의 서글픈 모습들을 거울에 비친 듯 따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마음이 아프다. 내일은 엄마에게 더 다정하게 말해야지! 내일은 엄마를 꽉 안아줘야지! 하지만 어느새 나는 또 엄마가 눈치를 보게 만들고 만다. 나도 언젠가 그런 모습이겠지. 내가 그 모습이면 너무 슬플 것 같은데, 지금 우리 엄마도 슬프고 속상하겠지?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안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엄마처럼 사는 삶'은 나 자신을 지워내는 희생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삶의 무게를 견디면서도 가장 숭고한 사랑을 선택하고 지켜낸, 고독하고도 강인한 용기였음을.

나는 엄마의 고통과 그림자만을 보았기에 "엄마처럼 되기 싫다"고 외쳤지만, 내 뱃속의 작은 생명이 결국 나에게 엄마의 진정한 삶을 되찾아주었다. 이제 나는 비겁한 회피 대신, 그 묵묵했던 엄마의 자리를 기꺼이 감사히 받아들였다.엄마처럼 살기 싫었던 딸에서, 이제 엄마처럼 사랑할 용기를 얻은 딸로서, 그녀의 삶의 짐을 이해하며 진심으로 말한다. 내일은 엄마에게 더 다정하게 말해야지. 내일은 엄마를 꽉 안아줘야지. 그리고 남은 날들을 더 많이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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