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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Aug 28. 2017

레오폴드 미술관:에곤 쉴레의 호흡을 따라

세기말의 그 비엔나(2)

이 글은 미술적 관점에서 전문적인 지식이나 감상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림을 공부하거나 배운 적 없는 개인의 편협한 관점이나 감상일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디터 베르너 감독의 영화 <에곤 쉴레 : 욕망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감각적이지만 알 수 없는 그의 난해한 표정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의 전개는 단출하나 쉴레의 표정은 복잡하게 전개해버린, 너무나 감각에만 의존한 것은 아닐까 싶은 느낌이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그림이 아닌 ‘직접적’인 쉴레를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그래서 비엔나 여행에서 이번 장소에 대해서는 제법 호기심이 들었다, 내가 그림으로 느끼는 쉴레는 어떤 느낌일까에 대해서.

 

에곤 쉴레 Egon Schiele는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와 만난 적이 있다.(아니 아주 많을 것이다.) 그와 만난 쉴레는 클림트에게 물었다고 한다. “제가 그림에 재능이 있을까요?”라고. 나는 그 문장에서 주저하고 고심하는 흔들리는 눈빛을 가졌으나 가볍지 않은 자아의 쉴레를 얼핏 떠올려 보았다.


천장이 높은 모던하고도 반듯한 흰색 건물 안에는 천창으로부터 내려오는 햇빛이 바닥까지 주저 없이 내려앉았다. 햇빛 사이로 날리는 먼지의 그림자까지도 집중 있게 보게 되는 건물 안의 공허는 밀도 있었고, 천장으로 이어지는 흰 벽에 붙어 있는 에곤 쉴레와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 코코쉬카 Oskar Kokoschka 등 화가들의 사진은 공간이 제법 진중한 아뜨리에 atelier로 느껴지게 했다. 그의 그림들을 모아 미술관을 만들었다는 레오폴드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궁금하다기보다는, 언제나 인터넷으로만 보던 그 그림들과 그들의 오브제 Objet를 직접 본다는 것의 차이가 무엇 일지에 더욱 궁금증이 닿아 있었다.




많은 크로키와 그림을 보며 나는 화가들의 치열했던 흔적이 너무도 뜨거워서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치열했던 삶의 흔적은 죽어서도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전한다. 그래서 사람은 영원을 살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동행했던 당신은 아주 오래전부터(내가 안 것만 이미 5년은 되었다.) 핸드폰 바탕화면에 쉴레의 <자화상>(1912)을 깔아 두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당신은 그의 그림을 보러 왔다는 사실 자체가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보였다. 당신은 얼떨떨하면서도 기대에 찬 표정을 굳게 다문 입으로 감추려 했지만, 이미 길 잃은 눈동자를 나는 진즉에 보았다.



쉴레의 그림 중에 내가 가장 기대했던 그림은 사실 <four trees>라는 작품이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책 표지 그림으로도 사용되었던 이 그림에는 나 혼자만 느끼며 가지고 있는 시간의 먹먹함이 있다. 그림은 혼자만의 세계의 나로 소환하는 능력이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그 순간은 사진처럼 머릿속에 박혀있기에 그 그림 앞에 서면 그때의 순간과 지금 나의 이 순간에 어떤 교차점과 공통점이 있을까 스스로 궁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그림은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흡사 네 그루의 나무가 있던 그 그림의 느낌과 흡사한 그림이 있었다. (후에, 벨베데레 궁전 Belvedere Palace에서 four trees를 볼 수 있었다.)



자화상 앞에서는 한참을 서 있었다. 당신은 그저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하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보고 핸드폰으로 여러 번을 찍었다. 전시실 내의 조명 등으로 인한 난반사 때문인지 역시나 그림을 사진으로 찍는 일은 참으로 멋없는 일이다. 별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찍는다.(인터넷에 찾으면 다 나오는 그 그림을 굳이 찍고 있다.) 그야말로 인증 샷으로 밖에 남을 수 없는 이 무모한 짓을 제법 많이 하기도 했다. 그 허깨비들을 찍어온 것이 그나마 적지 않은 관람료를 지불한 것에 대한 대가일까.



 

제체시온 secession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클림트와 쉴레, 그리고 때로 코코쉬카에 대한 내용을 당신은 짤막짤막하게 끼워 넣었다. 사실 이 미술관에는 클림트와 코코쉬카 등의 그림과 각종 가구와 소품 등의 공예품도 있었다. 그들의 그림에 한정된 미술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표현의 수단에 있어 전방위적이었고, 경계가 없었기에 예술이라 쉽게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쉴레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쉴레의 삶에 대해 구경하고 고민했다. 퇴폐와 성적인 감각만으로 그를 송두리째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괴롭혔을까, 그는 도대체 누구였고 누구였어만 했을까. 나는 20대 중반에 꽤 아팠다고 이야기했던 과거의 당신이 떠올랐다. 딴에는 젊은 시절의 열병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혼자 생각했다. 당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누구나 20대에는 그 나이 대에만 갖는 우울이 있기에 당신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우울을 오래 간직하는 사람이 있고, 덮어두었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별일 아닌 듯 잊고 사는 사람이 있겠다. 당신은 어느 쪽일까. 나는 어느 쪽일까.


 

쉴레가 그린 “집”에 대한 그림을 보며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온기를 느꼈다. 거친 선과 더 거칠어 보이는 면의 채색이 따뜻함과는 관계없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왜 그의 그림에서 온기를 발견하게 된 것일까.


나는 그 온기를 벨베데레 궁전에서 본 <The embrace>에서도 느꼈다. 이 그림에는 알 듯 모를 듯 불가능에 대한 갈망과 온기가 동시에 느껴졌는데, 제목도 hug가 아니라 embrace라 그랬을까. 다만, 당신을 껴안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더 꼭 안을 수밖에 없는 느낌. 그것 말고는 다른 여지가 없다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든 면에서 그 제목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온몸으로 사람을 안는 일, 나는 그 일의 무게감과 안도감을 알고 있다. 그 에로틱의 위태로움 뒤에 부는 진한 숨결을 알고 있다. 쉴레는 죽기 1년 전에 이 그림을 그렸다.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면을 벨베데레 궁전의 미술관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온기를 품어보는 느낌이었다. 그의 깊숙한 곳을 만지고 온기를 나누며 나의 어떤 시점에 대한 위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제법 오래 나에게 집중하며 시선과 시선을 잇다 보니 동선은 어느덧 미술관의 끄트머리, 기념품샵을 앞두고서야 나는 당신을 다시 바라보았다. 역시나 한참을 말없이 있었던 당신도 이 곳을 들어올 때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에서의 에곤 쉴레의 그림에 대해 덧붙임

이 그림 앞에서 앙상한 한 그루의 나무가 쉴레가 세상을 떠나기 전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어떤 자화상보다도 적나라한, 그 색채감에 몽롱한 기분마저 들었다. 언젠가 침대에서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다가, 한강의 소설을 읽다가, 한참 손목에 힘이 빠졌던 순간이 생각났다.

<Four trees>, 1917



<The embrace>,1917



* 그리고 이 두 점의 그림은 한 방에 함께 걸려있었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미처 다 느끼지 못했던 강렬함을,

두 작품을 동시에 보며 제법 오래도록 마음을 뗄 수 없었다.


 * 장소 : 오스트리아 비엔나 레오폴드 뮤지엄(Museumplats 1, 1070 Vienna, Austria), 벨베데레 궁전(Prinz Eugen-Str. 27, 1030, Wien)
* 사진, 글 : 나빌레라(navill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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