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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사랑이었을.

극단의 시대와 사랑, 윤심덕.

by 경계선 Apr 03. 2025

절절한 사랑의 경험을 떠올리고 싶을 때 나는 윤심덕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한다. 윤심덕이 살아온 그 시대의 고통이, 그녀를 경주마처럼 좁은 시야에서 달리도록 했을까.


1900년대 초반 아메리카와 유럽은 자본주의 체제의 신화에 길들여져 돈의 맛 그 자체에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였다. 식민지 경영은 최고조로 달하게 되고, 자본주의의 달콤함에 뇌가 절여지다시피 할 수밖에 없을 그 아득한 시간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가지지 못한 자유와 속박된 과거에 신음하고 있었을 때였다. 새로운 서양의 문화가 아시아로 흘러들어와 기존의 사고방식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을 시기였다. 그나마 일본은 식민지를 건설하는 나라라서 대체로의 일본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부유하게 잘 살았을까. 오히려 일본의 양심 있는 지식인들의 답답함과 도덕적 부채의식을 부채질하지는 않았을까. '국가'라는 이름은 예술과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횡포일 때가 많다. 횡포와 무지막지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꽃잎처럼 여린 감성과 삶을 노래하고 싶었던 예술가들은 괜찮았을까. 사상가들은 어땠을까. 순수하게 어떤 것들을 갈망하던 모든 이상주의자들은.


윤심덕(1897-1926)은 부유하지 못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다행스러운 것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구한말의 소수의 여성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대체로의 여성에게 학교란 온당치 않지만, 학교를 갈 수만 있다면 그 여성은 자신의 현실에 대해 자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 힘은 자신을 추동할 에너지로 쓰인다. 그리고 세상에 맞서던가, 세상을 길들이던가 해야 한다. 그냥 살 수는 없다. 무언가를 알게 되면 알기 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같은 시대 신여성으로 불렸던 나혜석이 그랬고, 김일엽이 그랬다. 

누군가의 인생이 빛난다면 남들과는 다른 길로 걷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이 고단해 보인다면 남들이 걷는 길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모두에게 손가락질받으면서도 빛나는 눈동자를 잃지 않으려 고단한 다리를 쉬지 않고 끝내 소진하는 불꽃처럼 삶을 태웠다. 그녀들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을 것이라 정의하기 전에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자신의 삶에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감정'과 물리칠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해서 오래도록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윤심덕은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였다. 당시 서양의 노래를 공부하고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녀는 비싼 학비를 들여, 관비로 일본에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도 노래를 할 곳이 없었다. 그리고 일본 유학 중에 만난 김우진이라는 그녀가 잊을 수 없었던 이름. 윤심덕은 그를 위해 가난한 집의 생활비에 동생들의 유학비까지 대겠다는 부잣집의 청년과의 혼담을 깰 수밖에 없었다. 김우진은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유학하고 있던 극작가였다. 김우진은 부유한 집안 분위기에서 가업을 이어받아야 할 처지였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문학을 버리지 못하고 <산돼지> 등을 썼던 구한말의 작가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사랑은 어려운 상황에서 둘을 이어 주기에 충분했지만,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현실을 더욱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쳐간다. 사랑은 '이상'이다. 현실에 안주할 수 없게 한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대충 현실에 녹아들어 체념하며 살아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들을 현실로 돌아갈 수 없도록 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하늘이 되어주었다. 하늘을 날던 새를 붙잡아 묶어둘 수 없다. 그러나 의미 없이 가업을 이어받아야 할 김우진과 관비 유학생으로 고국에 돌아가도 조선총독부 만을 위해 노래하는 촉탁 가수가 되어야 할 윤심덕. 그들의 예술과 이상에 대한 사랑은 여린 나비의 날개처럼 그대로 바스러질 예정이었다.


1920-40년대 일본의 사상가 혹은 작가들의 자살은 왜 그리도 유행이었을까. 진정한 삶을 위해 죽음은 필연인 것처럼 그들은 죽음 이후에 새롭게 삶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사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아리시마 다케오 같은 작가들의 자살 혹은 정사情死가 낯설게 다가와 일본 문학들에 거리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만연했던 그 시기의 지식인들은 고통의 터널을 자기 파괴적인 방법으로 지나가고 있었을까. 전쟁에 나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 못하겠으니, 이 세상에 살지 않겠다는 생각. 모두가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 시대만이 공유했던 어떤 공기의 흐름이 있을 것이다. 삶이 솜털처럼 보드랍던 시대는 분명 아니다.


특히나 '아리시마 다케오'라는 유명한 작가의 정사를 도쿄에서 신문기사로 접하게 된 윤심덕과 김우진은 무슨 생각을 나누었을까. 

현재도 윤심덕과 김우진은 정말로 정사를 한 것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갑론을박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분명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시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사랑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사랑 아니면 걸을 곳이 없는 가시밭길 같은 그 시간을 윤심덕은 뚜벅뚜벅 걸었던 것 같다. 아마 김우진에게 내미는 손길이 가장 쉬운 길이었을 것이다. 그 길이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윤심덕이 김우진과 스물아홉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진정 현해탄에 몸을 던져 죽었을지, 다른 곳으로 가 새롭게 삶을 시작했든, 조선에서의 이름과 몸을 버렸다. 나이 스물아홉에 세상을 버렸다고 가정하면, 그들이 산 인생에서 남긴 것은 그다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드라마로도, 영화로도, 소설로도, 심지어 뮤지컬로도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 간단한 삶은 아니었으리라 반증한다. 그 자체로 그들은 그 시대를 우리에게 읽어내려 준다. 윤심덕이 현해탄(대한해협 : 일본과 부산 사이의 바다)에 몸을 던지기 전, 일본에서 레코딩을 마친 앨범의 마지막 곡, <사의 찬미> 속 윤심덕의 목소리가 고단했던 그녀의 삶을 상상하게 한다. 그 축축한 시대의 고통과, 독립운동 아니면 친일로만 삶을 제단 하던 사람들의 이분법적인 시야에 가려 서서히 죽어가던 그녀의 눈빛을 상상하게 한다. 



이바노비치 <다뉴브강>이라는 곡에 노랫말을 직접 붙여 녹음한 윤심덕의 1926년 목소리입니다.


"사의 찬미"

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https://youtu.be/lG4LolklcbQ?si=awW2I75CCM2SuK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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