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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사각 Jan 01. 2024

이별

화해가 가능한 사이?

S는 P에게 감정적으로 생각을 쏟아내고 전화를 끊은 후 반성을 했다. S의 장점이라면 화해를 빨리 한다는 점. 화해가 되지 않은 불편한 상황을 견디는 걸 힘들어한다.


가끔 재활용 쓰레기처럼 차곡차곡 쌓아놓은 화를 한 번에 분출하여 상대방을 놀라게 할 때가 있지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도 빠르다.     


전화로의 언쟁 이후 이틀 동안 통화를 하지 못해 S는 사과하려고 전화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연락을 해오던 P도 잠잠한 것을 보면 크게 놀란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날, S는 P와 카페에서 통화를 시작했다.      


S는 자신이 과도하게 화를 낸 것에 관해서 미안함을 표시했다. 하지만 P는 그 시발점이 된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긴 했지만 이렇게 계속 부딪히게 될 것 같다면서 만남을 끝내고자 했다. S는 화해를 시도했으나 P는 이미 마음의 정한 듯 반응이 냉담하였다.      


“그럼 어쩔 수 없으니 각자 제 갈길을 가야죠.” S가 다시 화가 슬슬 치밀었지만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미안하다. 그래도 밴드에서는 가끔 보자.” P는 예의 사투리 억양을 섞어 쓸데없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아니오. 전 그러고 싶진 않네요. 잘 지내세요.” 차이는 것 같은 S의 착잡한 심경.      


“좋은 남자 만나라.”      


“네.... 잘 지내시고요.”    

  

단 한 번의 데이트였지만 이 주 동안 그가 주절거린 온갖 약속과 미래에 관한 청사진들이 문득 떠오르곤 했다. 참, 사람의 말이란 이렇게도 나뭇가지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눈 같은 것인가?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는 말다툼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한편에서 사과를 하는 데 받아주지 못하면 그 관계를 이어갈 끈은 없다. S는 그동안 P와 수없이 주고받은 카톡 메시지 방을 나오고 차단을 눌렀다.


마음속에 남아 머리를 어지럽히는 여러 가지 상념과 미련에도 문을 단단히 걸어 닫고 싶어서.      


다음 주에 예정대로 S는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갔다.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호르몬 검사에 혈액 검사까지 한 결과를 보니 갱년기에 접어들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여성 호르몬 수치가 현저히 떨어졌다고 한다.


‘안 그래도 성격이 여성적이지 않은데. 호르몬이 줄어서 더 남성스러워진 건가?“      


S는 조신하고 얌전해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으나 실제 성격은 그다지 여성적이지 않다. K 장녀이며(그렇다고 장녀로서 경제를 책임지고 집안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 책임감 있고 유머가 있지만 중요한 사안에는 평소 언행이 진지한 편이다. 어떤 아이는 ’선생님은 진지충‘이라고 했더랬지.


P가 그토록 열망하던 ’애교 넘치는 여성‘이 아니다. 만취를 하거나 시간이 지나 친해지면 귀여운 구석이 있긴 해도 평소 애교가 몸에 배어 있지 않은 편. 연애를 통해서 S는 자신의 성향을 깨닫고 어울리는 상대방을 더 알아가고 있다.       


중년의 연애에는 참 걸림돌이 많다. S는 곰곰이 지난 두 명의 짧은 만남을 돌아봤다.     

 

일단 그 둘 다 크게 외모나 성격이 끌리지는 않았다. S는 오십이 가까운 자신을 감안하여 다 내려놓고 연애 대상자의 기준도 낮춰 봤다. 지천명을 넘어서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너무 까탈스럽게 굴면 아무도 못 만나지 않을까 싶은 조바심에서였는지.      


오십 대 중반을 넘어가는 남자는 꽤 많이 늙는다. 가슴 두근거리는 첫 데이트를 하는데도 지친 얼굴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일주일 내내 회사 일에 시달리고 주말에 나온 그들은 한층 더 팔자 주름이 깊어졌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화관에 간 P는 영화가 자기 취향이 아니라며 두 시간 내내 숙면을 취했다. 곁눈으로 슬쩍 들여다본 그의 얼굴이 늙고 힘들어 보였다. 입을 살짝 벌리고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자는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든달까?


잠에서 깬 P가 캑캑거리며 기침을 하기에 옆에 놓은 아이스커피를 받쳐주었다. 감기에 걸려서 콧물도 줄줄 흘리시고 참. 자신이 늙어가는 건 인식하지 못하고 나이 들어 보이는 상대방의 얼굴에 깜짝깜짝 놀라는 형국.   

   

마지막 통화에서 P가 ’무섭다‘ 고 평하여서 S는 자신의 분노조절력을 돌아보게 됐다. 평소의 나긋나긋함에 비해서 상당히 공격적인 태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애교가 없음‘을 다시 강조하는 그의 말에는 진저리가 났다.


지인에게 ’애교‘ 넘치던 부인이 바람나서 이혼한 거 아닌가 하며 비아냥거리는 마음이 불쑥 생기기도 하고.      


그녀가 애교가 얼마나 넘쳤는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이 생겨서 이혼한 것은 사실이었다. 개인사를 들어보면 구구절절 인생의 비극이 많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만.   


P와의 초단기 연애를 마치고 S는 후유증을 겪었다. 급하게 차단을 하면서 마음을 정리해도 어떤 이별이든 적절한 애도 기간이 필요한 것 같다. 잠결에 함께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분이 기억나거나 헛된 약속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누가 죽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꿈꾸던 ’사랑‘이 한겨울의 눈처럼 녹아내려 사라지는 걸 보는 건 마음이 무너지는 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게 두려울 만큼이나 힘든 이별이다.

뱅쇼와 함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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