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W는 찜질방 모임에 함께 가면 S의 집 근처로 차로 와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다지 적극적인 구애는 아니었지만 살짝 궁금해져서 S는 급조된 벙개 모임에 참석 버튼을 눌렀다.
다음 날 오전에 W에게서 집 근처로 오겠다는 메시지가 왔다. S는 마음이 조금 설레었다. 한겨울 세찬 바람은 아니나 봄바람 같은 포근한 설렘.
W는 사려 깊고 친절했다. 그는 몇 년 동안 정신이 너덜너덜해지는 힘든 이혼 소송을 겪으며 밴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큰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마치 밴드의 리더처럼 적극적으로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썼다. 그 몇 개월동안 친분을 꽤 쌓았는지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훈훈하고.
W의 또래들이 몇 있었고 볼링 모임을 하면서 자주 만나서 가까워 보였다. 차 안에서 W와의 대화는 별 어색함 없이 편안하게 흘러갔다. 조용하고 과히 사람들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조곤조곤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ISFJ)이었다. ‘I’ 성향이지만 야구 등 각종 스포츠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찜질방은 지방 소도시의 목욕탕 같은 분위기로 다소 오래되었고 주말이어서 가족 동반으로 나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S는 카운터에서 받은 빛바래고 낡은 분홍빛 티셔츠와 조금 더 진한 색깔의 반바지를 입고 매점 앞에서 W를 기다렸다.
그는 한참 후에야 커다란 종이 가방을 들고 등장했다.
여기저기 누워서 자리를 잡은 성인들과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가득한 마루에는 앉을 장소가 없었다. W는 이층으로 자리를 찾으러 올라갔다. S는 정신을 놓고 앉아서 기다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지금 위를 올려다봐. 1시 방향으로.” 그는 장난스럽게 설명했고 S는 두리번거리다가 그를 발견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W는 몇 주 동안 연속으로 사람들과 찜질방을 와 본 것 같았다. 약속 시간이 지났지만 세 명이 더 오기로 되어 있어서 분주하게 핸드폰을 보며 어디에 자리를 잡았는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배 고프네요.” 점심때를 훌쩍 넘겼으므로 S가 입을 열었다.
W는 비치 타월로 덮은 종이 가방에서 먹을거리를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고구마와 팥 호빵, 잘게 썬 콜라비, 구운 계란, 반 건조 오징어와 고추장 소스, 찐만두, 천해향 등 먹을거리가 즐비했다.
점심을 사 먹을 요량이었는데 그는 점심을 대신할 생각으로 잔뜩 챙겨 온 것 같았다. S는 배가 고프니 도착 전인 다른 사람들 몫까지 몰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놀러 갈 때는 먹는 재미가 크니까.” W는 살림하시는 주부처럼 꼼꼼하게 챙겨 온 변명을 하며 말을 흘렸다.
W는 섬세한 분이었다. 한 시간 여가 지나서 세 명이 더 합류하여 인사를 나누고 여러 불가마를 돌아봤다. S는 몸에 열이 많고 찜질방을 그리 자주 오지는 않는 편이다.
호기심에 101도 불가마에 들어갔다가 숨이 막힐 것 같은 뜨거운 열기에 깜짝 놀라서 머리를 들이밀자마자 나왔다. ‘아이고, 수육처럼 푹 익을 뻔했네.’
40도 정도의 불가마가 가장 편안했다. 여전히 덥기는 했으나 견딜만한 온도. 천장의 낯선 종유석을 바라보면서 W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종유석의 모양이 기괴하고 몇 천년 된 동굴에 들어온 것처럼 어두컴컴한 방안에 사람들이 구석기인들처럼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몇 분이나 있었을까 W가 잠이 올 것 같다고 해서 일행들이 있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한바탕 불가마 투어를 마친 후 더위를 식힐 맥주 한잔이 간절해졌다. 여탕 안의 매점에서만 맥주를 판매한다고 해서 S는 시원하게 맥주를 쏘기로 했다. 그래봤자 단지 230ml 네 캔. 금액이 얼마 하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전날 68 남자분이 집까지 데려다주셔서 고마운 마음에 점심을 사기로 한 대신에 간단하게 보답을 할 수 있어서. 다만 캔 맥주의 온도는 기대만큼 차갑지 않아서 실망이었다. 다음에는 집에 있는 맥주를 가져오겠다는 70 님에게.
“차갑게 마셔야 하니까 얼음도 같이 가져오세요.” S는 웃으며 억지스러운 농담을 건넸다.
찜질방에 모인 네 명의 중년 남자들은 저녁으로 무엇을 먹으러 갈지 토론을 시작했다. 의기투합한 메뉴는 만두전골. S는 찜질방의 헬스장에서 30분을 뛰어서인지 허겁지겁 많이도 먹었다.
느린 속도로 30분을 뛰어서 1,500 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30분을 온전히 뛰었다는 성취감에 맨발에 전해지는 뜨거움도 참아냈다.
저녁 후 커피를 마시며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나른함에 젖어들었다. 뱅쇼를 시켜 봤는데 알코올의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운하다. 이러다 진정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거 아닌가. 자제해야지.
연 이틀 모임에 참석하느라 피곤해서 집에 가고 싶었는데 68 남자분이 또 볼링을 치러 가자고 분위기를 몰아갔다.
‘아, 어지간히 볼링에 빠진 분들이로구만. “
68님의 주장으로 밤 10시에 다시 볼링장으로. S는 볼링에 흥미가 없어서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두 시간이 넘어가니 점점 지쳤다. 카 oo택시로 요금을 조회해 보니 삼만 원이 넘는 금액이 나오기에 혼자 집에 갈까 하다가 조금 더 기다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눈을 살포시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소파에 다소곳이 눕고 싶었지만 직원이 제지할 것 같아서 간신히 참고서.
”피곤한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집까지 차 안에서 30분이라도 자요.” W는 부드럽게 말했다.
자정을 넘겨서야 게임이 끝났고 W는 친절하게 언덕 끝에 위치한 S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전 사람과 친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연애를 한 지 30년은 넘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네요.”
W가 차 안에서 무심코 던진 말이 기억났다. 연애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과의 만남을 기대해 봐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