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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람 Dec 26. 2023

병가 십오일

다시, 전정신경염이라 진단

9월 22일 수요일

 

 명절 연휴 동안 서울 자취방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엄마도 제주에서부터 부산 본가로 돌아가지 못하고 집을 떠나 있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계획해서 아플 수 없었으므로, 명절에 식구들이 한 곳에 모일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부산에 있는 식구들과 전화로만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안 되겠다. 그냥 부산에 가자. 가만히 누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 보내는 게 답답하다. 여기 살림도 내 살림이 아니고, 니도 누워만 있는데, 서울에 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부산에 다른 식구들도 계속 내버려 둘 수 없고. 부산 내려가야 내가 편하게 여러 군데 병원도 알아보면서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좁은 자취방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만 보고 가만히 누워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곧바로 엄마와 나는 부산으로 내려왔다. 연휴가 끝나도 회사에 출근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 어려웠으므로, 우선 부산으로 가자는 엄마의 말에 따른 것이다. 부산에 내려오자마자 엄마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어지럼증을 잘 고친다는 병원을 찾아냈다. 큰 병원에서 어지럼증 전문의로 유명했던 의사가 따로 개업했다는 이비인후과부터 집 가까이에 이름난 한의원까지. 연휴 마지막날이었음에도 병원과 한의원을 각각 전화로 예약할 수 있었다. 한의원은 바로 다음날인 목요일, 상대적으로 대기 환자가 많았던 이비인후과는 금요일로 예약했다.




 한의원에서는 비장과 위장이 좋지 않으면 어지럼증이 생긴다 했다. 양의원에서 검사할 때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면, 비장과 위장이 원인일 것이라고 했다. 나는 평소에 잘 먹고 소화도 잘된다고 말했지만 한의사는 젊어서 불편한 걸 못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면 평소 약한 기관부터 탈이 난다고 했다. 일반 병원에서는 전정신경염이나 이석증이라는 이름으로 진단하지만, 근원적으로 장기의 기력을 회복시켜야 나을 수 있다고 한의사는 조언했다. 비장과 위장을 회복시킬 수 있도록 침을 맞았는데, 여러 군데 침을 맞으면서 어지럼증이 덜해지는 것 같았다. 침 치료가 정말 효험이 있는지, 아니면 기분 때문인지는 상관없었다. 이 만큼이라도 어지러운 증상이 덜해질 수 있다면 날마다 침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비인후과는 규모가 큰 개인병원이었다. 원장을 포함해 일하는 사람이 스무 명은 되어 보였다. 병원 안은 직원보다 두세 배 많은 환자들로 가득 차있었다. 원장은 6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노의사였는데 예약 환자 진료만 받는다 했다. 많은 어지럼증 환자를 치료하면서 쌓은 노하우로 어지럼증 환자들 사이에서는 명의로 불린다 했다. 의사는 조용히 내 증상을 듣더니 말했다.

 "아마도 전정신경염으로 추측이 돼요. 사람마다 일주일 만에 낫는 사람도 있고, 길게는 몇 달 가는 사람도 있어요. 어지러워서 구토를 하기도 하고. 우선 검사를 해봅시다. 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니깐, 우선 검사 결과를 보고 다시 진료하겠습니다."

 전체 검사는 3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움직이는 조명 불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검사라든지, 암실에서 카메라가 달린 헤어밴드를 차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검사 같은 것이었다. 한 발로 서서 균형을 잡기도 하고, 눈을 감고 제자리를 걷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펜의 끝을 잡고 종이에 글자를 쓰는 것으로 검사를 마쳤다. 검사가 끝나자 다시 의사의 진료가 이어졌다.

 "전정신경염이 맞아요. 진료실 밖으로 나가시면 전정신경염 회복을 위한 운동을 가르쳐 드릴 거니깐 배워 가시고요. 어지럽다고 안 움직이면 회복이 더 늦습니다. 회복 운동 열심히 하시고, 멀미약도 같이 처방해 줄 테니 가져가시고."

 "서울대병원 이비인후과에 전정신경염 검사랑 MRI 예약해 놨는데, 그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안 받아도 됩니다. 지금 그 검사를 한 거고요. 머리 검사도 같이 했으니깐 굳이 필요 없어요. 운동 배워가서 열심히 하면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의사의 진단은 주저함 없이 명쾌했다. 큰 병이면 어쩌나 고민하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단서로 회사에 병가를 신청했다. 15일이 한 해에 신청할 수 있는 최대였다. 남아있던 휴가를 이미 전부 소진했으므로, 15일 안에는 다 나아서 출근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보통 한 달 정도면 낫는다고 했으니깐, 지금까지 앓았던 시간 감안하면 15일 안에는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거야.' 다짐인지 기도인지 모를 말을 속으로 되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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