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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진섭 Apr 04. 2016

불안할 자유

불안 속 감추어진 자유를 누리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황장애'는 생소한 질환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뉴스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예전보다 자주 듣게 된 것 같다. 정신과가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부정적인 시선이 많은 탓일까. 많은 사람들이 공황장애로 고생하지만 주변의 시선과 사회적 분위기가 그 고통들을 덜어줄 만큼 따뜻하진 않음을 종종 느낀다. '공황장애'를 영어로는 'Panic disorder'라 표현한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의 표현이 적절하다 싶을 만큼 그 순간의 불안은 마치 죽을 것 같은,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괴롭다고들 말한다. 감사하게도 나는 의사도 아니고, 그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지만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비교적 많았던 것 같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마음의 병은 절대 낫지 않아. 단지 나아질 뿐이지.'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구나, 라는 생각을 한 건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불안이 내게 단어에 불과하던 때, 그 단어가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이해하기 위해선 많은 노력들이 필요했고 사실 지금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 일 것이다. 우린 누군가의 마음을 공감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타인의 마음을 100%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범주가 아닐까.



불안의 뿌리


'시험 혹은 발표를 앞두고 있을 때, 실수를 했을 때, 사랑하는 이가 몇 일째 연락이 되지 않을 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만약 내가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된 경우라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정을 불안이다. 불안을 정의하자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며 말도 더듬게 되고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꽉 채워 다른 무언가가 들어갈 틈이 없는 상태, 가 아닐까. 사람은 불안을 느낄 때 그 상황을 잊고자 혹은 벗어나고자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생각하기도 힘들 만큼 격한 운동을 해서 몸을 지치게 만들거나, 친한 지인과 수다를 떨며 털어보려 하거나,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에 열중한다거나, 술에 힘을 빌려 잠시 잊어보거나.


그만큼 불쾌한 감정이기에 이런 다양한 시도들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러한 시도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닌 그 순간 느끼던 그 불안이 잘못된 감정인가, 하는 점이다.


원시 인류를 생각해보자면 어딘가에 정착하여 무리를 이루고 살기 전까지 수렵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잠시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숲 속에는 맹수들이 먹잇감을 찾고 있고 그 맹수들에 맞서기에 인간은 연약했다. 아니, 맞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 환경을 긴장하며 살펴야 하는 건 당연했다. 생존을 위한 '본능' 이었다.


어쩌면 불안이란 감정의 뿌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 본능은 아니었을까.


인류가 강성해지고 문명이 발달해가며 두려움에 떨게 하던 맹수들은 동물원에서나 보게 된 뒤로 사람들은 그 본능과도 같은 불안에 무뎌지고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먹이사슬 맨 위에는 인간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불안이었다면 이제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을 위한 불안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며 잘 살기 위한 필요조건은 돈이 되어 사람들 간의 경쟁구도를 만들게 되었고 타인에게 지지 않기 위해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 속에 살아가게 되었다. 과도한 긴장이 일상이 되어버리고 제 때 덜어내지 못하여 어딘가에 조금씩 쌓인, 유전자 속 각인된 본능이 다시금 꿈틀거리며 마음의 오작동을 일으킨다.


우리의 마음이 '살기 위해' 파업 선언을 한 것이다.



타인의 시선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현대사회는 과거에 비해 여러 면모에서 발달했다. 그만큼 편리해졌고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누군가와도 마음만 먹으면 얼굴 보고 통화할 수 있을 정도로 소통이 원활해졌다. 그러나 편리함 뒤에 많은 것들이 억압되어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과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만 생각해보더라도 인터넷은커녕 휴대폰을 갖고 있는 사람조차 없었던 것 같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친구 집 전화번호를 적어둔 메모장을 찾아가며 전화를 하거나, 친구 집 앞에서 친구를 부르는 등 다소 정성을 들여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정성을 들인 소통은 투박하지만 소중함이 느껴졌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2016년 현재, 많은 것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최신이 최선이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타인과의 비교대상이 되어버렸다. 실시간 검색어에는 연예가 가십, 유행하는 패션 등 최신 트렌드들이 줄지어 떠오르고 그 트렌드에 뒤쳐지는 듯한 느낌은 사람으로 하여금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이따금 집 근처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어제 봤던 드라마, SS 신상, 스포츠.'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싶었다. 자신만의 가치로 살아간다는 건 분명 소중한 일이지만 사람에게 필요한 건 공감과 소통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절실하게 와 닿던 순간이었다.


이처럼 누군가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것이 또 다른 불안의 원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타인과 나 자신의 끊임없는 비교는 때론 성장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자존감에 스크래치를 새기고 그 세세한 균열들은 마음의 상처로 이어지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와 긴장과 불안 속에서가 아닌 편안한 상태에서 마음 깊숙이 자리한 진심을 나눈다는 건 그래서 어렵다고 하나보다.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아도,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내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던 순수했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불안할 자유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그냥 이대로여도 괜찮지 않나.'


오늘은 유난히 사람의 체온에서 느낄 수 있는 온기가 그립던 하루였다. 정신없이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잠시 쉴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문,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선선한 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잠시 감았다.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20분쯤 지나서야 오전 내내 몸을 경직시키던 팽팽한 긴장의 끈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듯했다.


'아, 아까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을까. 좀 더 실수 없이 완벽했어야 하는데.'


참 답답할 만큼 나 자신을 구석까지 밀어붙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대충해도 될 텐데, 실수 좀 하면 어떤데. 시간은 흘렀고 퇴근길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지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었고, 수습 못 할 큰 실수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똑같은 일상이었는데 왜 이리 지쳐있었던 걸까.


언제부턴가 지치는 날이면 일기를 썼던 것 같다. 한 줄, 두 줄 내용에 상관없이 마음속 응어리들을 풀어내어 누군가에게 투정 부리는 듯 풀어낸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 누군가에게 검사받기 위한 것도 아니기에 내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히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아...' 하며 쥐고 있던 펜을 멈추게 된다. 드러내지 않았던, 감추고 싶었던 내 본연의 모습과 만나는 순간이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약점이 있듯 나에게도 약점들이 있지만 가장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면 '불안해하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 이었다. 왠지 스스로가 약해지는 것 같고, 다른 사람보다 못나 보이고, 뒤쳐지는 것 같은 기분이 싫어 언제부턴가 불안이란 감정을 느낄 때면 그 감정을 다른 무언가로 포장하여 감추거나 아예 부정하곤 했었다.


일기를 쓰며 그동안 억압하고 부정했던 내 불안이란 감정은 내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사를 받으면 이상은 없는데 시름시름 앓고,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은 늘 터질 듯 쿵쾅거리고.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지 않기 위하려 애쓰다 정작 내가 상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불안할 때 느껴지는 느낌들은 썩 달갑지 않다. 없앨 수 있다면 없애고 싶기도 하다. 항상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지만 그 불쾌하고 달갑지 않은 느낌이 내게 말해주는 메시지가 있었다.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수도, 왜 불안한지 알면서도 그냥 인정하기가 싫은 것일 수도, 그냥 걱정이 많은 것일 수도.'


때론 이러한 복잡 미묘한 느낌들로부터 벗어나고자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면 속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치부를 말한 것 같아 더 불안할 때도 있다. 그렇기에 한 번쯤은 그 불안이 내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찾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실수도 많고 엉성하기도 하지만,

매일 넘어지는 것 같아 그만두고 싶기도 하지만,

더디게 변하는 내 모습에 지치기도 하지만,


지금 이대로여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불안을 숨기지 말고 '불안할 자유'를 만끽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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