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을 겪고 있는 청춘들의 연극 이야기
"쾅"
이것은 천둥소리가 아니다. 이것은 도로에서 차 부딪치는 소리도 아니다.
이것은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가 문 닫고 들어가는 소리다.
"야, 어디서 문을 쾅쾅 닫고 들어가? 문 안 열어?"
"................."
이때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 한 소리를 하면 분명히 "어? 몰랐어. 그냥 문 닫은 건데?" 할 것이 뻔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나를 쳐다보는 아이를 보면 다음 행동 판단이 안 선다. 화를 내기도 뻘쭘하고, 그냥 나오기는 더 모양 빠지고, 여기서 멈추기는 무척 자존심이 상한다. 어느 집에나 흔히 있는 이 장면은 우리 집 사춘기 딸과 갱년기 엄마의 일상이기도 하다.
사춘기는 청소년이 아동기를 벗어나면서 큰 변화를 겪는 시기다. 갱년기는 완경과 함께 여성이 노년기로 들어서며 큰 변화를 겪는 시기다. 이 전 우주적 변화의 시기가 대체로 한 집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사춘기를 통해 아이는 세상을 향해 혼자 걸어가겠노라 선언했다. 나는 갱년기를 거치며 한 인간으로 자유로운 첫걸음을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세상 겁날 것이 없었다. 서로 만나지만 않는다면.
이십 대 딸은 큰 소리 떵떵 치며 세상사 다 아는 것처럼 우쭐대지만 매일 부딪치고 깨지는 시간을 살고 있다. 앙리 할아버지의 집 초인종을 누르며 들어선 콘스탄스의 모습은 그런 딸을 닮아 있었다.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2020년 12월 YES24 Stage, 원작 이방 칼베락)는 아버지에게 독립해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 콘스탄스가 까칠 대마왕 앙리 할아버지의 집에 세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콘스탄스는 늘 뭐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주눅 들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아노를 연주하는 콘스탄스를 본 앙리 할아버지는 주저 없이 음악학교 입학을 권유한다. 괴팍하고 까다롭기만 했던 할아버지가 콘스탄스에게 해 준 말은 의외였다. "너, 아버지 말 듣지 마라."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콘스탄스에게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오라고 용기를 준다. 그렇게 70세 노년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할아버지는 사고뭉치 콘스탄스의 독립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존재가 된다.
연극 <1인용 식탁>(2020년 5월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원작 윤고은, 연출 이기쁨)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독립된 삶을 이야기한다. 입사 9개월 차 신입사원 인용은 혼자 점심을 먹는다. 직장 왕따인 셈이다. 인용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심지어 직장 사람들은 인용과 점심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 인용은 마침내 '혼자 밥 먹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학원에 등록하고 만다. 인용은 이 학원에는 혼자 밥 먹는 방법과 용기를 배우기 위해 등록한 사람들과 함께 배우며 서로에게 응원을 하게 된다. 인용은 혼자 식당에 들어가서 당당하게 1인분 식사를 눈치 보지 않고 마치는 과정을 마스터할 수 있을까?
연극은 통쾌하고 유쾌하게 막을 내린다. 인용은 학원 동기들과 당당하게 고깃집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고깃집에 들어서서 한 사람씩 각자 테이블에 앉는다. 저마다 취향대로 1인분의 고기를 시킨다. 이제 고깃집은 혼자 고기를 먹는 인용의 동기들로 가득 찼다. 이들은 혼자 식사를 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혼자의 삶은 누군가의 지지와 응원이 함께 해야 단단해진다. 혼자의 삶은 고립된 삶이 아니라 함께하는 삶과 공존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자, 이쯤 되면 독립을 위한 만반의 준비는 끝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다. 나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이십 대나 오십 대나 칠십 대나 쉽지 않다. 그래서 춘향전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몽중인> 시리즈-나는 춘향이 아니라, (2020년 9월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원작 이연주, 구성/작/작창/소리 이승희)는 존재감 없던 향단의 정체성 찾기로 눈길을 끌었다.
영화나 이야기책 속 향단은 철없는 여종일 뿐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 당연히 향단을 눈여겨본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것은 춘향이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니 그런 것이다. 향단이 세상 속에서는 향단이가 독립된 어엿한 인간이다. 시대로 따지고 들면 인간도 아닌 종 신분이지만 그거야 그 시절 이야기인 거고, 2021년을 사는 우리는 향단이도 향단이 보는 세상이란 게 있다는 걸 안다. 향단이만의 인생이란 게 있단 얘기다. 그래서 춘향이 아니라 향단이를 주인공으로 만나는 시간이 신나고 흥분될 수밖에 없었다.
공연을 보고 집에 오니 큰 아이가 술에 반쯤 취해 들어왔다. 웬일로 술을 같이 하잔다. 그러자는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맥주와 소주를 들고 내 옆에 앉았다. 소주를 못 먹는 엄마를 위해 맥주를 챙겨주는가 싶어 내심 고마웠다. 그러면 그렇지! 큰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맥주와 소주를 섞는 거다. 그것도 엄마 앞에서.
"엄마, 내가 오늘 말이야......"
소맥을 몇 잔 더 말더니 아이는 자러 간다며 일어섰다.
"얘? 방은 찾아가야지? 네 방 거기 아니야."
본인은 걸어 들어갔다고 하지만 반쯤 기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너도 네 인생 사느라 참 애쓴다. 우리가 모두 춘향이 일 수는 없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