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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ight Aug 27. 2021

흐르는 건 내 마음뿐

5월 31일 15:10, 수술 일정이 확정되었다. 오전 수술이면 금식도 빨리 끝날 텐데 오후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디게 갔다. 5월 끝자락에 암수술이라니. 본가에 맡긴 아이 사진을 보고, 아내와 이야기를 하고,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해봐도 아직 한참이었다. 잠깐의 졸음과 유튜브, 6인실 천장 형광등과 오르락내리락하는 침대. 병실에 모든 것은 그대로였고 흐르는 건 내 마음뿐이었다.


"ㅇㅇ 환자분 되시죠? 휠체어에 타시고 안경은 다른 곳에 맡겨주세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안경을 써온 지독한 난시에 근시라 맨눈으로는 상이 맺히지 않는다. 나안으로 휠체어에 타니 무력감이 몰려왔고 이제부터는 흘러가는 시간과 상황에 맡기는 수 밖에는 없었다. 잘하고 오라는 아내와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수술실 리셉션 같은 곳에서 대기했다. SF영화를 보면 티끌 하나 없는 흰 공간에 이계인들이 아이패드 같은 기기를 들고 다니는데, 딱 그 느낌이었다.


수술실 간호사가 병명, 수술부위를 체크하고 다른 분이 와서는 몇 가지 유의사항을 설명하며 서명을 받아갔다. 패드 내용을 볼 수 없으니 이러저러한 안내사항을 듣는데, 그렇게 중요한 사항이면 시간이 남아도는 병실에서 왜 미리 설명을 해주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진짜 수술실로 이동하는데, 간호사분들은 참 밝게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수술이 일상인 그들에게 환자 인계도 일상일 테지. 긴장한 지원자들을 면접장으로 이동시키는 인사팀 직원도 이런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수술대에 누웠다.


"긴장 많이 하셨나 봐요. 힘 좀 푸시고 이제 마취제 들어갈게요." 긴장을 안 할 수 없었다. 전신마취도 처음인데다가, 내 몸에 그것도 내 목에 칼을 데는 건 처음이지 않은가. 머리가 고정되는 수술실 베개(정확한 명칭을 모르겠다)에 뉘어 몸을 비닐로 싸고, 여러 준비들이 있었다. 의대 실습생도 들어오는지 수술 과정을 교수가 지켜보라고 했다는 등 소리들이 하나씩 들어왔다. 마취과 의사가 말한 지 3초 남짓 눈을 감았다.


회복실에서 가래침을 뱉자 간호사가 정신 차리라며 티슈로 침을 닦아줬다. 살긴 살았구나, 살아는 있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수술 후 유의사항(3시간 이상 깨어있어야 하고, 전신마취로 쪼그라든 폐를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계속해줘야 하는 것 등)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다. 아내는 생각보다 수술이 오래 걸려서 걱정했다며, 수술 중간 의사가 했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가족 카톡방으로 이미 보내며 상황전파를 하고 있었다. 갑상선 내 암세포는 작았으나 근육과 일부 유착된 점, 보통 전이는 아래로 가는데 위쪽 임파선에서 발견된 점이 주요 특이점이었고 수술은 잘 되었다는 게 요지였다. 젊어서 전이가 빨랐던 것 같다는 의사 소견에 하루라도 수술일정을 앞당긴 게 다행이었다.


2인실로 옮긴 병실에서 밤새 베개를 뒤척이고 침대를 움직였다. 4시간 가까이 고정된 상태로 누워있어서 그런지 뒤통수 쪽이 뻐근할 정도로 아팠다. 고개를 돌리기도 힘드니 쉬이 잠이 오지 않았고, 애꿎은 아내에게만 담요를 달라 베개를 바꿔달라고 했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면 그냥 환자다. 진해거담제, 진통제 알약을 삼키고 핏물이 나오는 배액관을 환자복 주머니에 넣은 채 수술 첫날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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