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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ight Sep 05. 2021

돌아보며 마주보며

"실밥을 다 풀면 와르르 쏟아질 수도 있으니까 일단 반만 풀게요." 삼성서울병원에서 예약해준 송도에 있는 외과를 들렀다. 상처부위를 지탱하던 실밥을 의료용 가위로 자르는데 느낌이 묘했다. 보통은 녹는 실로 봉합한다는데 절개 부위가 커서 그런지 낚싯줄 같은 실이 툭툭 떨어졌다. 다음 외래 일자를 잡고 병원을 나서는데 사원증을 목에 건 무리들이 지나갔다. 아 점심시간이구나. 


두 달 가까운 병가 생활은 '돌아보기'와 '마주 보기'였다.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동안 직장에서 너무 일에 몰두하지는 않았는지, 금요일이 아쉽다는 이유로 맥주나 치킨을 관성적으로 찾았던 건 아닌지 하는 것들을 고찰했다. 갑상선암이라는 게 특별한 원인이 없다고 하니, 유전적 요인을 제외하고는 결국 내 습관이 쌓여 암이 생겼을 터였다. 그렇다고 유기농 식품이나 자연주의 식단에 충실했던 것은 아니고, 일단 술을 끊었다. 보통 5년 동안 관찰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평생 술은 먹지 않을 것 같다. 아내와 금요일 퇴근 후 기분 내던 와인이나 맥주가 인생에서 로그아웃 되었다는 점은 매우 아쉽지만, 몸을 생각하면 술은 차마 먹을 수가 없다. 


8월에 복직하는 아내와 우연찮게 휴직 시기가 맞아 아이를 참 많이 마주했다. 어린이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하원길에 보는 빠방이 무엇인지 아내를 통해 듣는 것과는 실제로 보는 건 많이 달랐다. 상처부위도 어느 정도 회복되면서 다시 안아주는 아빠가 신기했던지, 책도 가지고 오며 무릎에 찰싹 앉는데 거의 찹쌀떡이 될 정도로 붙어 있었다. 세 시 반이면 돌아오는 하원 시간이 왜 이리 빨리 돌아오던지. 아침에 집안일을 하고, 장인 장모님과 점심을 종종 먹고, 잠깐 쉬면 육아가 시작되는 간단해 보이지만 병가를 내지 않았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고난도 루틴이었다. 야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녹초가 되어도 저녁을 차려주던 아내가 새삼 존경스러웠다. 


얀센 접종도 맞았는데 딱 6시간 후부터 머리가 띵하며 열감이 오르더니 금세 38도를 넘었다. 응급실을 갈까 말까 고민하던 차, 타이레놀을 두 알씩 삼킨 게 효과가 있었는지 다음날 등에 땀이 흥건히 나더니 열이 내려갔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다 싶더니 팔 주변에서 멍이 발견돼서 혹시 혈전 문제는 아닌지 부랴부랴 피검사도 했다. 약간의 염증반응이 있을 뿐 정상이라는 말을 들으니 수술을 해서 건강염려증이 생긴가 싶다가도, 건강에는 돈을 아끼지 말자고 다짐했다. 한번 무너진 걸 되찾기에는 시간, 노력이 배로 든다는 걸 입원 생활하며 느꼈기 때문이다. 


공복에 신지록신을 입에 털어 넣으면 하루가 시작된다. 병가 초반에는 퇴직이라도 한 사람처럼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할 줄 몰랐는데, 일상이라고 여겼던 이 생활이 일상에서 멀어지는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화 매트릭스 속 네오는 빨간약과 파란 약을 두고 고민이라도 했건만, 아무리 신지록신을 털어 넣어도 피할 수 없는 건 현실이기 때문일까. 이런저런 잡생각이 들 때 '출근'이라는 강력한 백신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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