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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Oct 08. 2024

외국생활에 대한 동경

왜 안 가셨어요? 3

그때 나는 왜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겨울은 3년 전 처음으로 스웨덴으로 떠나가던 때를 회상했다.

남편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다른 말로 하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다. 휴학 없이 학석사 연계과정을 마치고 난 선우는 전문 연구 요원으로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병역 특례 업체가 박봉인 중소기업인 것을 감안하면 좋은 조건으로 취직한 셈이다. 하지만, 주로 하드웨어에 포커스 되어 있는 대기업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한계는 분명해 보였다. 세계적인 IT기업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며 앞서가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선우는 그곳에 있지 못함을 늘 안타까워했다.


5년의 전문 연구 요원 기간이 끝난 뒤, 겨울은 이직준비를 권유했다. 그 분야에서 최첨단의 기술을 만들어내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뤘으면 하는 마음이 반이었고, 시도조차 안 하고 신세한탄만 하는 게 보기 싫은 마음이 나머지 반이었다. 영어도 코딩도 원하는 회사에 갈 정도는 아니니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다며 주저앉기엔 선우는 아직 젊었다. 서른, 충분히 노력해 보고 꿈을 접어도 늦지 않은 나이였다.


영어를 공부하고, 입사용 코딩 문제를 풀면서 이직 준비를 하던 중에, 첫째가 태어나면서 시간적으로 압박이 있었지만, 선우는 틈틈이 이력서를 쓰고 코딩 문제를 풀며 지원서를 냈다. 수백 번의 서류 탈락과, 여러 번의 최종 면접에서 탈락하면서도 지치지 않았다. 비자 때문에 미국에서 유럽으로 눈을 돌리고 난 뒤, 합격소식이 들려올 때쯤에는 둘 사이에는 이미 두 아이가 생긴 뒤였다. 타이밍 좋게도 둘째의 육아휴직이 시작한 뒤였기 때문에  식구 모두 함께 스웨덴으로 떠났다.

사실, 선우와 겨울 모두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었다. 등록금을 못 낼 정도까지 아니었을 뿐, 둘 다 어학연수니, 교환학생을 갈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둘 또한 그저 빨리 졸업해서 자기 밥벌이를 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던 터라, 외국으로 보내달라고 제대로 졸라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둘이 자라던 어린 시절은 외국에 대한 환상이 가득하던 시대였다. 드라마에서 툭하면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외국에서 살다 온 교포들이 연예인으로 데뷔하는 게 흔했다. 외국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실제 생활이 어땠는지와 상관없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주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 어학연수니 교환학생으로 외국에 나가는 친구들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특히 문과라면 어학연수는 필수였다. 외국에 나갔다 온 아이들은 거기에서 다른 학생들이랑 같이 주위를 여행한 얘기며, 파티에 가서 놀았던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정말 다른 세상 같았다. 그렇게 갔다 온 뒤에 많은 아이들은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자신감 있게 영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슷비슷하게 고작 수능영어나 했던 수준이었는데, 영어로 수업을 듣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친구를 먹다니, 티는 안 냈지만 둘은 그런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다.

가끔 회사에서 퇴직할 때, 그만두고 남편 따라 외국으로 간다고 인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어느 좋은 기업으로 이직한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부러워했다. 각종 사고 처리하느라 바쁘고, 급하게 위에서 떨어지는 일 해내느라 정신없는 이 생활을 청산하고 외국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복 받은 인생인가.

겨울도 선우를 따라 스웨덴에 나가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브루마블에 있던 도시, 스톡홀름. 북유럽에 위치한 복지국가, 선진국 스웨덴. 딱 이렇게만 알고 선우는 회사에 지원했었다. 날씨는 북유럽이니까 춥겠거니 생각했었고 무슨 언어를 쓰는지조차 몰랐다. 막상 붙고 난 뒤, 조금 고민했지만 어차피 겨울의 육아휴직기간이니 그동안 경험해 보고 결정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 밑바탕에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갈망과 외국 생활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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