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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가주 Dec 23. 2020

아빠의 유산

다시, 랩 걸

호프 자런의 ‘랩걸’을 다시 읽고 있다. 이 책은 미국의 여성 과학자인 호프 자런의 인생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그녀는 과학 교수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뛰어난 지구 물리학자에게 수여하는 제임스 매클 웨인 메달을 받고, 풀브라이트상을 세 번 수상한 유일한 여성 과학자이기도 하다.
과학의 이야기이자 나무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인생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처음 읽을 때와는 다르게 한 단어, 한 문장 꼭꼭 씹어 마음에 담아 가며 읽고 있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많아 노트에 필사하고, 나무 이름을 찾아보고, 원서와 비교해보는 자발적 즐거움의 시간을 누리고 있다.‘나무’에 대한 그림책을 책장에서 잔뜩 가져다 감상하며 함께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작가는 대학에서 물리학과 지구 과학을 가르쳤던 아버지의 실험실에 대해 회상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보고, 만지고, 느꼈던 것들을 생각하며 자신이 과학자가 된 것이 ‘깊은 본능’에 토대를 두었다고 말이다. 실험실이라는 공간에 대한 기억과 감각, 그곳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녀의 머리와 가슴에 자연스럽게 새겨져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연스러운 유산이 그녀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확실히 안 유일한 사실은 언젠가 내 실험실을 갖게 된다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아빠도 아빠의 실험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작은 마을에서 아빠는 그냥 과학자가 아니었다. 과학자라는 것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아빠의 정체성이자 신분이었다.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내 욕망의 근본은 깊은 본능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랩 걸, 호프 자런. p34>

그녀는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어린 여자아이에서 과학자로’ 변신했다. 모든 실험 장비들을 만지고 가지고 놀던 소녀가 과학자로 성장해 간 것은 그녀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나무와 식물의 삶에 빗대어 자신의 삶을 이뤄나가는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그녀가 꿈을 향해 노력하고 매진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어릴 적 아빠의 서재는 집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제일 조용하고 아늑한 그곳엔 아빠의 커다란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엔 아빠가 글을 쓰실 때 사용하시던 타자기가 있었는데 동생과 나는 아빠가 안 계실 때면 종이를 끼어 넣고 글자를 치며 놀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에 둘이 앉아 피아노를 치듯 탁탁 소리를 내며 자판을 누르면 글자들이 종이에 그대로 인쇄되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과 스크랩북은 아빠가 가장 아끼던 물건이었다. 신문을 자르고 스크랩북에 옮겨 꼼꼼하게 어떤 자료인지 기록을 남기는 일을 곁에서 많이 보며 자랐다. 아빠에겐 살가운 딸은 아니었지만 아빠가 쓰신 글들은 꼼꼼히 읽었다. 원고 마감이 되는 날이면 아빠는 서재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한참을 있다 나오실 때면 손엔 흰 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난 서류봉투 안의 종이뭉치를 손으로 느끼며 한 장, 한 장 아빠의 머리와 손으로 완성된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곤 했다. 마감이 끝나고 그다음 주면 아빠의 글이 신문 한쪽에 실렸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을 집으로 가져다 놓는 건 내 담당이었다. 아빠는 아침 식사를 하실 때 꼭 신문을 읽으셨다. 아빠의 칼럼이 신문에 나오면 아빠는 나를 불러 보여주시고, 기사를 잘라 스크랩북에 붙여 놓으셨다. 하나두 개 늘어가는 아빠의 스크랩북을 들쳐보며 어렴풋하게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아빠의 서재 같은 공간은 나에게도 있다. 비록 작은 공간일지라도 이곳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많은 생각을 한다. 자런의 실험실에 대한 글을 읽으며 오랜만에 아빠를 기억한다. 아빠의 서재를 그리워하며 아빠의 의자에 앉는다. 책상 위 타자기에 손을 올려놓는다. 아빠의 굽은 어깨 넘어 보이던 흰 종이 위의 단어와 문장들을 바라본다. 아빠의 생각과 고뇌들을 상상해본다. 이제 지금의 나로 돌아온다. 노트북에 타닥타닥 글을 쓰며 생각에 잠긴다. 타자기를 두드리며 글을 새겼던 어릴 적 내가 보인다. 아빠의 글을 마음속에서 다시 꺼내 읽어본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내 본능이 아빠에게서 온 줄을 몰랐다. 아빠가 남겨주신 무형의 유산이 자연스럽게 나에게 새겨져 있는 줄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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