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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밈 Feb 02. 2021

물병;

012. 너는 귀찮은데 네가 가진 게 탐나

  매일 아침 출근하면 물병과 물컵을 씻는다. 육십몇 살이 되어 퇴직하는 순간까지 날마다 병과 컵을 씻으리라 생각하면 아득하다. 이렇게 철저하게 반복해야 할 루틴이 또 있을까. 종교인의 의식쯤 되어야 그리 오랜 시간 반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컵을 씻듯 마음도 씻겨나가면 좋으련만. 대체로 멍하니 '아.. 오늘도 하루가 시작됐네'같은 생각만 한다.


  낮동안 700ml쯤의 물을 마신다. 여기에 커피도 몇 잔 더 마신다. 아침에 뜨거운 물 한 컵과 물 1L를 담아오지만 오후면 여지없이 부족하다. 집에 있으면 그렇게까지 물을 마시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회사에선 물이 당긴다. 오후에 물을 새로 떠 오기가 귀찮아 2.5L짜리 덤벨 모양의 물병을 쓴 적이 있다. 지나가는 모든 동료가 시선을 집중했고, 아침에 물을 뜨고 있으면 '물을 정말 좋아하나 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딱히 그렇진 않은데요.. 질문을 받지는 않으면서 한 번만 더 물을 떠 오면 하루를 보내는 1L짜리 물병으로 정착한 지는 제법 되었다. 1.5L짜리가 딱일 텐데 질문을 견디기엔 내가 너무 수줍다.


  산을 오를 때도 물병은 귀찮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자주 가지 않는 등산을 억지로 가노라면 물병은 대체로 부모님이 들었다. 그것이 좀 너무하다며 겨우 철이 들어보려는 나이에는 나 대신 언니가 들었다. 올라가는 행위만으로 뒤로 넘어갈듯한 나를 위해 언니는 묵묵히 물을 업고 갔다. 혼자 뒷산을 오를 땐 겨우 500ml짜리 병 하나만을 들고 갔다. 어찌어찌 목적지에 도착해 물먹는 하마가 되노라면 1.5L짜리 커다란 페트병을 메고 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등산을 시작할 땐 단 한 번도 500ml 이상의 무게를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물은 무겁고도 귀찮다. 그런데 마시고 싶다. 그 와중에 큰 물병은 번거롭고 또 요란하다. 그런데 물은 많이 마시고 싶다. 물병과 나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때가 되면 나는 득도의 경지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니, 결국 물병을 통한 도 닦기는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오늘은 오후에 물을 추가로 떠마시지 않고 목이 말라도 버텼다. 부질없는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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