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은행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부족함없는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1980년생인 나는 어릴때부터 부산 사직동에 있는 대단지 복도식 아파트에서 살았고,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서예학원 등 다양한 학원을 섭렵했으며, 태권도하는 옆집 친구따라 태권도에다 나름 획기적이었던 전화로 하는 윤선생 영어교실도 했었다.
집에는 당시만 해도 꽤 비쌌던 원목 피아노도 있었고 어머니는 두 아들 기죽이지 않기 위해 부산에서 가장 유명했던 부산백화점에 우리 형제를 데리고 가서 늘 메이커있는 옷과 신발 그리고 레고, GI유격대 같은 장난감을 사 주셨다. 그리고 형은 그 유명한 보이스카웃 활동도 했고 그룹과외뿐만 아니라 당시 부산대 음대교수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피아노 레슨도 받았다.
그리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집도 중산층의 상징인 마이카시대를 열어 젖혔다. 재밌는 건 그 당시 아버지는 스텔라를 사고 싶어 하셨는데 당시 은행 지점장들 차가 스텔라라 결국 아래급인 쏘나타를 구입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안정된 직장 덕분인지 주말이면 늘 테니스, 골프를 치러 다니셨고 그 외에도 수석, 서예, 난, 액자, 사진, 수지침, 수족침 같은 다양한 취미생활(자기계발?)을 마음껏 즐기셨다. 그때 나는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엘리트 느낌의 은행원 아버지를 보며 부족함없이 자란 나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은행원을 꿈꾸었고 은행만 취업하면 나도 부모님처럼 흔히 중산층 수준으로 부족함없이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었다. 사실 아버지가 은행원이었기에 학창시절 당당하게 아버지의 직업을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늘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언젠가 엄마 손을 잡고 아버지가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은행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출근한 직원들과 조회 중이었고 그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고등학생때 아버지가 지점장으로 승진하자마자 기사딸린 차가 나왔고 그런 아버지가 인생의 롤모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1998년 드디어 우리 집안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고 은행원이 되겠다는 나의 꿈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바로 1998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IMF가 터지고 만 것이다. 이후 아버진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은행에서 명퇴를 당하셨고 아버지처럼만 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나의 머릿 속은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늘 멋지게만 보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잃고 축 쳐진 채로 집에만 계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 힘들었다. 물론 그 누구보다 아버지가 가장 힘들었을 거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퇴직금 사기까지 당하셨는데 어머니께서는 퇴직금을 아버지가 어떻게 하시기야 하겠냐는 생각과 남자가 호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또 안 되니까 그대로 맡겨두고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안심하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귀 얇고 남의 말 잘 듣는 아버지 성격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부모님은 불법 다단계까지 빠져 모든 걸 잃고 결국 법정파산에 이르게 된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통한 간접경험 덕에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 상사 눈치 봐 가며 꾸준히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10여년 전 내 나이 만30세에 과감히 퇴사 후 독립을 선언했고 이제는 거의 불가능해진 평생직장이 아닌 독립근로자이면서 1인지식기업가이자 N잡러로서 다양한 일을 하며 영원히 구조조정 걱정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한때는 원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버지께 감사할 따름이다. 20년 전엔 정말 나도 아버지처럼 살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고 나의 미래 역시 아버지의 모습과는 다르길 바랄 뿐이다. 우리 집안은 고혈압이 내력인데 몇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아버지는 반신불수에 언어능력도 잃어버린 채 요양병원에 누워만 계시다 코로나19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2021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결과적으로 아버지 덕분에 일도 건강도 신경써서 챙기게 되었으니 남겨주신 유산은 한푼도 없지만 이보다 값진 유산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