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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Jul 12. 2020

9. 말을 잘하고 싶은데


  사람은 말한다. 사람은 말하기라는 행위로 다른 사람과 소통한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몸짓도, 글쓰기도 소통의 한 방법이다. 하지만, 말하기만큼 즉각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사고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 누가 말을 못 하고 싶을까. 기왕이면 세련되고 감동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을까. 나는 그랬다. 유려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로 풀어내는 배우들의 인터뷰를 읽으며, 적절한 유머와 감동을 섞어가며 수업을 이끄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언제나 부러움을 느꼈다. 말을 잘 못했으니까. 


 어린 나는 수줍음도, 겁도 필요 이상으로 많았기에 학교생활이 조금, 아니 많이 괴로웠다. 선생님께 칭찬도 듣고 싶고, 같은 반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싶은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들은 폐기물 소각장에 모인 쓰레기들처럼 쌓여갔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었지만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어 더 두려웠다. 그러던 중, 아마 초등학교 3-4학년 때였을 텐데, 수업 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토론 수업을 시도하셨다. 지금에야 드물지 않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아서 더 생생히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 날의 토론 주제는 “교복, 꼭 입어야 하는 것인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토론 전의 학급은 찬성과 반대가 거의 반반으로 갈렸다. 미세하게 찬성이 많았는데, 나는 그 결과가 못마땅했다. 초등학생이던 나의 생각은 대강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아니, 학생은 사람도 아냐? 사람이 원하는 옷 하나 입는 것도 규제하는 걸 이렇게 아무 문제제기 없이 온 국민이 받아들이고 있는 건 어딘가 이상해.’ 가뜩이나 중학생이 되면 그 갑갑한 교복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해 몇 년 뒤의 일을 미리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자, 이제 각각 찬성하는 친구와 반대하는 친구 중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이야기해보자.” 나도 모르게 번쩍, 손을 들고 말았다.


 다행히 나보다 조금 더 앞에 앉아 있던 친구에게 먼저 발언권이 주어졌다. 그 아이는 자신이 왜 교복 입기를 찬성하는지에 대해 나름의 근거를 들어 주장한 후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그 친구와 거의 동시에 손을 쳐들었던 나를 잊지 않고 계셨다. “그래, 그러면 아까 같이 손 들었던 한나가 이야기해볼까?” 차라리 저 친구 전에 먼저 이야기했다면 덜 당황스러웠을까. 머릿속이 누군가 우유를 들이부은 것처럼 새하얘졌다. 욱하는 마음에 손을 든 게 죽도록 후회스러웠다. 쭈뼛쭈뼛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평소 단답식의 발표도 잘 하지 않았었으니까. “네, 저는, 학생들이 교복을, 꼭 입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뒤의 말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한 두 마디 정도 겨우 추가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셨고, 아이들은 에이, 뭐야, 하는 눈빛으로 나를 살짝 쳐다봤다. 상황은 종료됐다. 하지만 나는 아주 오랜 시간 그날의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 내가 그렇지 뭐. 난 역시 말을 못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게는 회복하기 힘든 실패처럼 느껴졌다. 아킬레스건에 쐐기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생애 최초로 경험한 그 실패의 무게는 어린 나이에 혼자 감당하기엔 좀 벅찬 중량이었다. 


 다행히도 이 모든 걸 지금은 웃으며 떠올릴 수 있다. 과거를 과거로 남겨둘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욕망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잘 하고 싶다는 욕망.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정체되지 않고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벽을 보고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배우에 빙의하여 가상의 기자에게 받은 질문에 혼자 답을 했다. 표준어를 연습했고, 일부러 발표를 자청해 인사와 농담 하나까지 대본에 써 달달 외워 발표를 했다. 그렇게, 아주 서서히 최초의 큰 실패, 그 낭패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심 누군가 내게 발언권은 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기까지 하는 것도 같다.


 실패로 인해 내 삶이 오히려 좋은 쪽으로 변화되었다고, 많은 걸 배웠다고, 그런 뻔한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런 말은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게 몇 살이냐를 막론하고 실패라는 결과 혹은 감정은 벼락같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 물론 결코 빠르지 않겠지만, 어쨌든 시간의 강물에 기꺼이 흘려보낼 수 있는 날이 찾아온다는 것. 실패는 두렵다. 언제나 두렵다. 그래도, 그 또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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