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날벌레> 6회
배우는 명주의 독채에 있는 대형 침대에서 상쾌한 새소리를 들으며 혼자 깨어났다.
성공적인 복귀 이후에도 그녀는 명주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아직 배우에게 투자 중인 회사로서는 조금이라도 리스크를 줄이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배우 역시 아직 활동에 대한 정산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고, 친언니처럼 따르는 명주에게 심적으로도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기에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막상 혼자만의 공간으로 오자 배우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곳 역시 명주의 공간이었지만 건물 주변은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아침과 오후 사이에는 적당한 햇살이 비쳐 들어와 포근하고 따뜻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잘 관리된 소나무 위로 가끔 날아드는 새들 외에는 누구도 그녀에게 침범하지 않았다.
배우는 문득 화려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조건 없이 품어줄 것 같은 이 공간의 인상이 마치 명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명주에게는 왜 이 공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배우는 소속사 신입 매니저로 만난 명주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아직 10대였던 그녀는 큰 키 외에 별달리 각인되는 부분이 없는 밋밋하고 무표정한 얼굴의 명주가 어딘가 따분한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었다.
보기와 달리 명주는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서는 쾌활하고 친밀한 성격이었고, 자신이 담당한 배우가 한 말은 모두 메모할 만큼 철저했으며, 세세한 것 하나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상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알아서 준비하는 세심함이 있었고, 어떤 순간에도 담담하고 차분하게 급한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배우가 쉬는 동안에도 명주는 일을 쉰 적이 없었다. 꾸준하게 발을 넓혀 가면서 업계 사람들에게 정보를 수집해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하며 사업 자금을 확장하고 있었다.
‘리나’ 시절, 배우가 왜 매니저를 하게 되었냐고 묻자, 명주는 말했었다.
“난 누구에게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내가 준 도움 때문에 기뻐하는 얼굴을 보는 게 좋거든. 누구든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 도울 수 있는 게 내 꿈이야.”
명주는 어쩌면 자신으로 인해 이미 꿈을 이룬 것인지도 몰랐다. 배우는 묘한 질투를 느끼며 테이블에 놓인 시나리오로 시선을 돌렸다.
돌이켜보면 배우는 단 한 번도 왜 연기를 하고 싶어 했는지, 자기 모습을 힘들게 바꾸면서까지 다시 돌아오고 싶었는지 명주처럼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이 시나리오는 내게 그 길을 알려줄 수 있을까.
배우는 짙은 붉은색 표지 위에 거친 느낌의 캘리그래피로 새겨진 <불 속의 여자>라는 제목을 괜히 노려보았다. 단어에서 오는 이미지는 직관적이고 강렬했지만,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자 두려움을 느꼈던 장면들은 생각보다 수위가 높지 않게 느껴졌고, 점차 ‘화진’이라는 인물에 이입되어 갔다. 배우는 생각했다.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침 10시가 되자 명주는 배우의 작품을 기다리고 응원하는 팬들의 댓글이나 전날 기사들을 캡처해 메시지로 보내주었다. 명주는 일을 시작한 이후 매일 비슷한 메시지를 아침마다 배우에게 전송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댓글과 기사가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칭찬하는 글 일색이었다. 그중에는 회사가 개입한 댓글이나 기사도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알면서도 기분이 살짝 들떴다. 다시 시나리오로 돌아가지 못한 채 수많은 댓글에 정신이 팔려있던 배우는 한 문장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리나 팬이에요. 돌아오길 늘 기다렸어요.
배우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다린 것은 자신이 아닌 '리나'일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리나는 연기력으로 사랑받은 적이 없었다. 오로지 10대 소녀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진 행운의 배역이었을 뿐이다.
당시에도 배우는 연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맡은 역할의 감정과 의도를 알아차리고 연기하는 천재적인 아역 배우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저 대본을 읽고, 외우고, 지문에 표시된 대로 정직하게 임했을 뿐이다.
때로 또래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기가 죽어서 자신도 모르게 지었던 난감한 미소를 사람들은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소녀의 미소라며 사랑해 주었다.
눈에 띌 만큼 예쁘지는 않지만, 친근한 이웃집 소녀의 상징이 된 '리나'는 노련한 상대 배우와 실력 있는 제작진의 빛을 받아 찰나에 반짝였을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다시 본 명주의 메시지 속 활자들이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기대하고 있어요. 리나.
이번에는 잘해봐요. 리나.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리나.
사랑해요. 리나.
리나는 할 수 있어요.
힘내요. 리나. 리나. 리나…….
수많은 익명의 말들이 벌떼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마구 쏘아대고 있었다.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탈바꿈한 외모도 더는 소용없게 느껴졌다. 언제나 사람들이 원하는 건 '리나'의 재기일 뿐이다.
배우는 영원히 자신으로 살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애초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잊어가고 있었다.
역시 안 되겠어.
배우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언니, 미안해. 아무래도....
못 하겠다고 말하면 다 해결될까?
광고는 아직 단발성 계약이어서 위약금을 물 걱정은 없고,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신비한 이미지만 유지하는 것이 안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걸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잊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결국 부딪혀야만 한다.
그토록 원한 일이 알아서 펼쳐지고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명주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해서 여기까지 왔듯, 자신도 리나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해서 리나를 연기하면 되지 않을까.
리나는 애초에 연기로 사랑받지 않았으니 기대는 크지 않을 것이다. 배우는 그새 말라붙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소파 위로 스마트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목이 탔다. 뭐라도 마실 것이 필요했다. 이럴 때 술을 마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배우는 모친을 닮아 술은 입에만 대도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혹시 취하기라도 하면 명주에게 '그것'을 삼킨 사실부터 털어놓게 될지도 몰랐다.
명주는 어떻게 나올까. 제정신이 아니니 모든 것을 중단하고 심리치료부터 받자고 할까. 아니면 그 지겨운 약들을 더 추가할까.
배우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 그것을 삼킨 이후에는 오직 물만 허용되었다. 아직도 식욕은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다시 무언가를 먹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어 더욱 두려웠다.
여러 가지 변수를 상상하며 고민하던 배우는 집중력이 흐려져 컵을 놓치고 말았다.
챙그랑-
비명 같은 파찰음과 함께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진 크리스털 컵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가 흩어졌다.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정신없이 유리 조각을 주워 담는 손가락에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아픔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득한 정신으로 갈팡질팡하던 그때, 차가운 무언가가 그녀의 손등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것'이었다.
배우는 비현실적인 홀로그램을 보는 기분으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연보랏빛 날개는 자신이 얼마 전 집어삼킨 그것과 같은 종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그녀는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방 환기를 위한 작은 창이 살짝 열려 있었다. 해를 가리기 위해 쳐놓은 차양 발이 옅은 바람에 흔들렸다.
언제 저걸 열어 뒀지?
배우는 다시 그것을 침착하게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다시 자신을 삼켜달라고 하는 것처럼 가만히 그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배우도 간절한 그것의 눈길을 피하지 못한 채 홀린 듯 마주 보았다. 입속에 점점 침이 고이고 있었다. 멈추었던 식욕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배우는 조심스럽게 그것이 앉아 있는 손등을 입 앞으로 가져갔다. 그것은 순종하듯 가만히 그녀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배우는 흡입하듯 그것을 입속에 넣고 이전처럼 입술을 닫았다.
파드득.
입천장으로 연약하고 필사적인 날갯짓이 느껴졌다.
처음보다 더 강한 생명력이 전해졌지만 배우는 입을 굳게 닫은 채 천천히 일어서서 그것이 차분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예상대로 움직임은 곧 잦아들었고 물컹한 덩어리만 느껴졌다.
배우가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꿀꺽 삼키는 동시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명주가 달려와 흐르는 피를 지혈하듯 배우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배우는 만족한 얼굴로 주변에 흩어진 유리 파편을 바라볼 뿐이었다. 반짝이는 조각들이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배우는 자신을 부축해 소파로 데려가 준 명주의 손을 잡았다. 배우의 손이 너무 뜨겁게 느껴져 멈칫하던 명주는 예민한 표정으로 배우를 살폈다. 우려와 달리 배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만 보였다.
배우는 갑자기 밀려오는 포만감에 긴 하품을 한 후 발바닥에 박힌 또 다른 유리 조각을 보며 나른하게 내뱉었다.
"언니, 나 아직 꿈이 덜 깼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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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