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날벌레 08화

8. 연애

소설 <날벌레> 8회

by 김영주

배우는 영화 홍보를 위해 상대역인 시호와 한동안 자주 동행하게 되었다.


시호는 배우보다 나이는 4살 어렸지만, 아이돌 보이그룹으로 데뷔한 후 급속하게 인기를 얻으며 배우가 복귀하기 이전부터 높은 인지도가 있었다.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를 두지 않고 안정적인 연기력을 보이고 있었고, 고정 예능도 두어 편 출연 중이어서 팬층이 다양했다.


촬영 내내 시호는 그녀에게 거리를 두었었다. 컷 사인이 떨어지면 배우에게서도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 인사조차 먼저 건네는 일이 없었고, 웃음기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감독조차 연인 역할인 상대 배역에게 너무 벽을 두는 것이 아니냐고 농 섞인 한마디를 했을 정도였다.


배우는 그가 이전, 다른 상대 여자 배우와의 추문으로 원치 않는 공백기를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이해했지만, 시호의 사정은 달랐다.


그는 배우가 '리나'였던 시절부터 팬이었고, 배우가 은둔하는 기간에도 가끔 근황을 찾아볼 만큼 오래도록 그녀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배우의 동물 보호소 인터뷰 기사를 보았을 때, 익명으로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그토록 응원하던 그녀가 드디어 복귀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기쁜 마음으로 같은 브랜드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막상 모습을 드러낸 적나라한 의상의 그녀를 다시 접했을 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다시 등장한 그녀의 모습에 리나는 없었고,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낯선 여자만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은둔 시절, 나리의 무방비한 모습보다 더욱더 참혹하게 보였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당장 배우를 무대 밖으로 끌고 내려오고 싶은 충동을 느끼던 그때, 자신을 향해 돌아선 그녀를 정면으로 보게 되었다.


사정없이 터지는 플래시 속에 배우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미소 속에 기이하도록 아름다운, 그가 그토록 그리워한 리나의 얼굴이 겹쳐 보인 것이다.


시호는 데뷔작부터 친분이 있던 유명 감독의 작품에 캐스팅되었을 때, 상대역으로 배우를 적극 추천했다.


감독도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시나리오 속 화진의 이미지에 부합한다며 그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주었다.


시호는 촬영 내내 승승장구하는 그녀를 보며 배우를 구원한 것은 자신이라고 믿었고, 이전과 완전히 변해버린 얼굴 속에서 간혹 스치는 리나의 표정은 자신만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에 우쭐해졌다. 촬영하면 할수록 그는 배우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고, 영원히 그녀를 자신의 곁에만 두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 우리 밖에서도 볼 수 있을까요?


배우는 촬영이 끝난 직후 상대역이었던 시호에게 처음으로 사적인 메시지를 받았다.


그전에는 서로의 연락처도 몰랐다. 연락처를 먼저 물어본 것도 시호였다. 배우도 시호에게 그전부터 호기심이 있기는 했었다. 나리로 지내던 그때, 피시방에서 가끔 시호가 소속되어 있던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배경음악처럼 자주 들었었다. 물론 배우가 좋아한 것은 댄스가 특기인 시호보다 목소리가 감미로운 보컬 멤버였지만 말이다.


배우 역시 촬영 내내 적정한 선을 지키며 자신을 선배라고 부르고 존중해 준 시호의 태도에 조금씩 호감을 느껴가던 중이었다.


배우가 느끼기에 시호는 단 한 번도 배우가 불편할 만한 질문이나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문자 메시지의 의중을 당장 알아차릴 수 없던 배우는 명주에게 상의할까 하다가 메시지 속 '우리'라는 단어에서 잠시 망설였다. 다수와 있을 때 '우리'라는 단어는 공공재였지만, 단둘을 지칭할 때는 의미가 달라졌다.


배우는 오래전 실패한 몇 번의 연애를 떠올리며 다시 명주에게 상의해 볼지 고민했지만, 손가락은 시호의 대화창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둘은 비밀스러운 한 번의 만남 이후, 곧바로 연애를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명주와 거의 동거하다시피 붙어 지내는 배우의 일상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정이 없는 날이면 배우가 주로 시호의 집으로 갔다. 명주에게는 집에 다녀온다는 말만 전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배우에게 시호는 단시간 동안이었음에도 내 집처럼 편안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살면서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단 한 가지, 걸리는 부분만 제외한다면.


“넌 왜 먹지를 않아?”


모든 일정을 마친 늦은 밤, 시호의 집 소파에 나란히 앉아 미스터리 소재의 TV 시리즈물을 함께 보던 시호가 극 중 연인의 식사 장면을 보며 불쑥 물었다.


아마도 계속 궁금했던 것을 참아준 것이리라.


두 사람의 식사 자리에서 배우는 늘 먹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몰래 음식을 냅킨 밑으로 숨기거나 식탁 아래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시호가 그동안 모르는 척해주었다는 걸 배우도 짐작하고 있었다.


"너와 먹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먹을 수가 없어서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녀는 귓등이 뜨거워진 것을 느끼며 시호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이제 이 관계는 끝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시호는 자못 안쓰러운 눈으로 배우를 바라보았다.


"이해해. 나도 그런 적 있으니까."


그도 자신처럼 정체 모를 벌레를 삼킨 적이 있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먹을 수 있는 것일까.


배우는 약간의 기대와 의구심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호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우리 일 하다 보면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일이잖아.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내가 아는 선생님이 있어."

그러면 그렇지. 배우는 실망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써 웃어 보였다.


이제 누구에게도 자신을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배우는 속이 답답해졌다.


그것을 이미 두 번이나 삼켰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삼킬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이제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앞날이 막막해졌다.


시호만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변에서도 이미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고, 가짜뉴스로 떠돌고 있는지 오래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을 지켜본 명주는 알면서도 소속사와 소속 배우라는 이해관계 때문에 모른 척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슬슬 생겨나고 있는 안티팬이나 경쟁사에서 결정적인 증거라도 찾게 된다면 벌레를 집어삼킨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멀쩡하게 버티고 있는 자신을 ‘괴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분위기 여신의 추락’이라는 문구로 편집되고 합성된 처참한 이미지가 자동으로 상상되었다. 거기에 다시 과거 악마의 편집과 루머로 고통받던 때까지 떠오르자, 그녀는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시호는 그런 복잡한 심중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가만히 배우의 손을 잡았다.


“앗, 차가워. 사람 손 맞아?”


시호가 어색한 분위기를 지우듯 웃으며 말했다. 배우는 웃을 수 없었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이게 치료로 되는 게 아니라면……. 어떡할 거야?”

“무슨 뜻이야, 그게?”


시호도 이제 웃지 않았다. 배우의 눈빛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배우는 답답한 심경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라며 진실 일부를 털어놓았다.


“난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이제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다고.”

“그것? 그게 뭔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지?”


시호는 아마도 그것을 ‘약’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최근 한참 몇몇 연예인들의 약물 및 마약 스캔들이 기사화되고 있었다.


배우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어떻게 해도 그것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희귀한 날벌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두 번이나 삼켜버렸다는 사실을 설명할 길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시호가 믿지 않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졸려서 잠시 헛소리했나 봐. 이제 잘까?”


배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시호의 침실로 갔다. 이제 시호와 이별할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울컥 눈물이 솟을 것만 같았다. 애써 눈을 감자 조용히 시호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말없이 옆으로 와 나란히 누우며 말했다.


“푹 자. 깨어나면 다 괜찮을 거야.”




배우는 이른 새벽에 꿈에서 깨어났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자는 동안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부어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좋은 꿈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한 요즘도 그녀는 종종 악몽을 꾸고는 했다. 특히 오늘처럼 시호와 함께 잠드는 밤이면 예약된 것처럼 악몽을 꾸고 새벽에 깨어났다. 두 사람의 만남이 꿈이고, 꿈이 현실인 것처럼.


배우는 갑자기 극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생수를 컵에 가득 따라 마셨다. 그러고도 뭔가 부족해 물병에 그대로 입을 대고 물 한 병을 단숨에 비웠다.


물병을 내려놓고 턱으로 흐른 물을 손등으로 훔치는 순간,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우는 귀를 의심했다. 시호는 아직 침실에서 깊은 잠에 빠져 코를 골고 있었다. 다시 한번 배가 뒤틀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같은 소리가 이번에는 더 크게 들려왔다.


이게 얼마 만이지?


분명 그것은 자신의 몸이 허기에 반응하는 소리였다. 그녀는 울컥하는 기분으로 복부 위로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그간 멈춰있던 장기가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먹고 싶어....!


배우는 냉장고 앞으로 달려갔다. 최신식 냉장고 도어 전면은 거울 같은 재질로 디스플레이되어 있었다. 서둘러 도어 손잡이를 잡던 그녀는 순간 거기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강한 충격으로 굳어졌다.


거기에는 ‘리나’도 ‘화진’도 아닌,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시절을 보낸 ‘나리’가 서 있었다.



소설 <날벌레>는 내일도 연재됩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keyword
이전 07화7. 불 속의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