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날벌레> 9회
배우는 자신이 아직 꿈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긴장하며 물병을 바닥으로 떨어트려 보았다. 챙- 하고 스테인리스로 된 빈 물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그녀는 흠칫 놀라 침실 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시호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배우는 얼른 일각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거울을 보았다. 그 속에 있는 여자는 ‘나리’가 분명했다.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확신한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울 속 나리의 초점 없이 흐리멍덩한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순간 패닉 상태가 된 배우는 발작하듯 머리를 거울 위로 부딪혔다.
연거푸 반복되는 충격에 급기야 거울 유리는 금이 갔고, 터진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배우는 아픔조차 잊은 채 흐르는 피를 손으로 훔쳐냈지만, 깨진 거울 속에는 여전히 일그러지진 얼굴의 나리가 서 있었다. 배우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욕실 바깥에서 잠에서 깬 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해진 배우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도저히 뭐라고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도망칠 곳이라고는 블라인드로 가려진 욕실 창이 전부였다.
“어……. 좀 미끄러졌어.”
그녀는 쉰 목소리로 대충 둘러대고 서둘러 창가로 다가섰다. 외부 전경이 내다보이는 욕실 창은 그녀의 몸, 그러니까 나리의 육중한 몸도 빠져나갈 수 있는 넉넉한 너비였다. 하지만 이곳은 17층 건물이다.
배우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시호와 함께 반신욕을 즐길 때는 로맨틱하게만 보이던 한강의 전경이 비현실적으로 아득하게 보였다.
뛰어내리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끝날 것이다. 지금은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들어간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시호가 잠긴 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급해져 창틀 앞의 난간을 밟고 올라섰다.
떨리는 손으로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상처 입은 그녀의 얼굴 위를 훅- 하고 거칠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게 흘러내리는 축축한 무언가를 손으로 훔쳐내며 긴 호흡을 내뱉었다.
이렇게... 다 끝나는 건가?
배우가 다시 숨을 삼키며 난간을 잡고 밖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그녀의 손등 위로 내려앉았다.
그것이었다.
배우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대로 뛰어내릴 것인가, 다시 그것을 삼켜볼 것인가. 찰나의 고민을 하는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것은 배우의 얼굴 앞으로 날아오르더니 귓가를 스쳐 욕실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 순간, 배우는 사냥하듯 맹렬히 그것을 쫓아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왔고, 욕조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것을 간절하게 잡았다.
다시 뱃속이 맹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게걸스럽게 그것을 입속으로 욱여넣었다. 이번에는 입속의 날갯짓조차 느끼지도 않고 혀와 이로 으깨어 마구 씹어 먹었다. 곧 꽉 찬 포만감이 밀려왔고, 배우는 만족스럽게 긴 트림을 내뱉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 앞에 경악한 표정의 시호가 서 있었다.
시호를 보고 혼절한 배우는 3일 만에 다시 깨어났다.
그녀가 잠든 사이, 세상은 온통 ‘배우 A 양의 기괴한 식습관’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영상으로 떠들썩해져 있었다. 배우는 아직도 긴 악몽 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기분이었다.
영상 속에 찍힌 자기 모습은 망가진 ‘나리’가 아닌 가냘픈 모습 그대로였지만, 가여운 날벌레를 단숨에 낚아채 잡아먹는 모습은 파충류를 연상하게 할 만큼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 모습을 촬영한 후 유명 가십 주간지에 제보한 장본인이 자신의 연인이었던 시호라는 사실 역시 인정하기 힘들었다.
“넌 그냥 가만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명주는 화도 내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어르듯 배우에게 경고했다.
예상한 것처럼 명주는 시호와의 비밀 연애와 배우가 오랫동안 거식증 증상을 겪고 있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비밀이 있다는 사실이 섭섭하고 실망스러웠지만, 당장 개봉할 영화에 오히려 시너지가 될 수 있는 사안이기에 시간을 두고 배우가 직접 사실을 말해주길 기다렸다고도 했다.
어쨌거나 배우와 시호는 이번 일을 계기로 완전히 결별했고, 두 사람 사이는 단순한 동료 사이로 해명되었다.
시호에게 결별 의사를 밝힌 것은 배우가 아닌 리나 엔터테인먼트였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야.
믿고 싶은 걸 믿게 해주는 거지.
명주는 곧바로 해명 영상을 촬영해 그녀의 유튜브 채널에 공개할 것을 배우에게 권했다.
명주는 그 기이한 영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우가 이른 새벽에 가벼운 슬립 차림으로 시호의 집에 있었던 것이라며 날벌레를 먹는 장면 따위는 곧 개봉할 영화 홍보를 위해 연출된 장면이었다고 하면, 무마할 수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미 시호에게 느낀 배신감과 자신이 왜 그것을 먹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품지도 않는 명주의 반응에 상처 입은 배우는 대응할 의욕조차 없었다.
다행이라고 할 것은 거울 속에 비쳤던 ‘나리’의 모습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그것을 삼켜서 돌아올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헛것을 보았던 것일까.
배우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소설 <날벌레>는 내일도 연재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