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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Dec 27. 2021

덤으로 주어진 삶.


아주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91년도 11월 중순 즈음

기침이 멎지 않던 아버지는 그냥 가벼운 감기이겠거니 하고

병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가셨다가 간암말기라는 판정을 받으셨다.


복수로 차오르는 배를 제외하고는 급격히 말라가는 몸을 가누기 어려워

누워 계시면서 온갖 병원, 한의원, 용하다는 민간요법에서 

비싼 약도 지어 드셨지만 이미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당시 14살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대체 우리 가정에 어떤 일이 일어난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학교를 가면 친구들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고 떠들고 장난치다가도 속으로 아버지가 아프신데 내가 이렇게 웃어도 되나?

현실과 현실 사이의 충돌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와서 방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보는데 

이전엔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뜨거운 눈물이 흘러 '어! 내가 왜 이러지?' 라며 

누워 계신 아버지와 그 앞에서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제3의 내가 

신기하게 여겨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결국 아버지는 그해를 넘기지 못하셨는데 

성탄절인 25일은 온종일 흐려 비가 내리더니 다음 날 26일에는 함박눈이 내렸고, 

눈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진단을 받고 불과 40여일.. 돌이켜보면 이별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형, 아버지, 나


아버지는 교회의 장로이셨기에 장례식은 교회장으로 치뤄졌고,

처음 입어보는 검은색 상복과 넥타이가 무척 어색하면서도 나름 근사해보였다. 

하관을 위해 천안의 묘소로 가는 날,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음에도

교회의 수많은 이들이 오셔서 다같이 한 마음으로 위로해주셨으며

형과 나는 한 삽을 퍼서 흙을 담고, 누나는 아버지 좋아하시던 눈을 한움큼 담아

그렇게 차가운 날 차가운 곳에 아버지를 남겨둔 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이지 않을까. 

내 삶에 자체적인 종말이 있다면 아버지의 나이 정도일테고, 

그러면 나는 44살까지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 


올해가 아버지의 30주기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버지의 멈춰있는 나이에 도달하는 때여서 

하루하루 그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지금의 나와 

그때의 아버지가 오버랩이 되며 약간의 긴장과 함께 

묘한 설렘이 지속되는 시간을 보냈다. 


여느 때와 같은 12월 26일의 주일 아침.  

차분한 성탄절을 보낸 다음 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누나네 가족과 이모를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하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고, 

홀로 세자녀를 키우신 어머니께 감사를 전했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죽음과 부재가 

마음 한구석을 누르던 돌처럼 자리잡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나이를 넘어선 날이 오니 

그 무게가 스르륵 풀리는 기분이다. 

이제부터야말로 그 분이 부르시기 전까지는 

결코 그 끝을 알 수 없는 생의 시간이 덤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 시간들을 어떻게 채워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걱정보다는 기대가 조금 더 된다. 


3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계신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가슴에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야지. 

아직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사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 윤희와 혜원이를 위해 

남편과 아빠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잘 물려줘야겠다고 다짐한다. 



20211226.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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