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말하기 어려웠던 사람은 우리 엄마였다. 우리 아이 셋,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해주시는 외할머니이시지만, 그전에 행여라도 당신 딸 힘들어하는 모습이라도 보일 세면 아이들에게 거침없이 “왜 우리 딸 힘들게 해. 너희 엄마 말 잘 들어야 해.”라고 말하시며 도리어 내 편 들어주시는 우리 엄마. 시시콜콜한 일상 전하느라 매일같이 통화하는 사이였는데도 딸 걱정부터 하실 게 눈 앞에 뻔히 그려져서 말 꺼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임신 4개월이 지나고 시댁 상견례 일정 전에 친정에 가게 되었는데, 엄마는 이제 셋째 아이 젖도 뗐고 애들도 많이 키웠으니 딸 다시 예쁘게 하고 다니라며 외출복 3벌을 직접 골라주셨다. 나는 엄마가 골라주신 옷을 피팅룸에 들어가 입어보면서 이제 조금 불룩해진 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번에 꼭 알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겠어서 왠지 점점 더 말하기 어려워지는 걸 느꼈다. 내 말 한마디로 그날의 분위기와 그동안의 엄마와의 관계를 깨기가 두려웠던 것 같다. 나는 말하지 못하고 일정만 마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공허한 일상 속에 살았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내지 못했다는 기분에 가끔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더 늦어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루하루는 빠르게만 지나갔다.
한 달 뒤, 아이들의 여름방학을 핑계로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3박 4일 정도 친정에서 지내며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집으로 내려갈 시간이 가까워졌음에도 내가 입을 떼지 못하자 보다 못한 신랑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장모님, 저희 넷째 가졌습니다.” 엄마는 잠시 멈칫하셨다. 신랑의 말에 힘 얻어 나도 임신 소식을 말했다. 그리고 엄마는 여러 차례 진짜인지 다시 되물으시고는 우리 점심 상으로 올려두신 주꾸미를 가만히 치우셨다. 그리고는 말씀이 없으셨다. 점심을 먹고 차에 짐을 실었다. 차 창문을 내려 아이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드렸지만 엄마는 웃지 않는 얼굴로 손만 흔드셨다.
한 달이 넘도록 엄마와 어떤 연락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갑작스럽게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가시겠다고 했다. 전화도, 대화도 오랜만이었다. 엄마 뵐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긴장이 되었다. 만나고 나서도 서로 어색함을 애써 숨기려는 듯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주셨고, 나도 평소와 비슷한 반응을 하려고 노력했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같이 장을 보러 가자고 하셨고, 나에게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셨다. 엄마는 생각해두신 음식이 있으셨는지 집에 있는 재료를 물으시고는 집에 없는 재료들과 소고기를 잔뜩 사셨고, 아침 상으로 잘 구운 소고기와 시원하게 끓인 소고기 된장찌개를 내주셨다. 아침을 먹은 뒤에도 엄마는 “엄마 가고 나서 먹어.”라고 하시며 쉬지 않고 토종닭백숙을 끓이시고, 배추 겉절이 김치 한 통을 담가 놓으시고는 집으로 가셨다.
며칠 뒤,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는 그동안 많이 아프셨다고 하시며 넷째 소식을 들으실 당시에도 몸이 온전치 않아서 더 많이 놀라셨다고 했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으니 당시 기억에 서운한 것이 있으면 잊어버리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에게 서운한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엄마가 아프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내 생각만 하느라 엄마 몸 알아드리지 못한 내가 싫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순간과 상황에서조차 딸에게 먼저 손 내밀어 주시는 엄마에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신호가 올 것 같으면 바로 전화해.
엄마가 내려갈 테니까.
오늘 엄마의 그 말에 마음이 울렁였다. 엄마는 일하고 계시니까. 나는 멀리 살고 있으니까. 혼자 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그 말에 힘이 나고 눈물이 핑 돌았다. 무조건적인 내 편. 우리 엄마 모습을 잘 간직해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우리 엄마의 모습을 남겨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아이들은 알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의 모습은 이미 엄마의 엄마로부터 전해져 온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