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기자 출신 한 대기업 홍보팀 부장님을 만났다. 그는 기업으로 옮긴지 꽤 됐는데도 '기자 물이 아직 남아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내게 조언을 구했다. 일단 저한테도 존댓말 쓰셔야지요, 하면서 웃고 말았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기자 물이라는 건 도대체 뭘까.
아마도 부정적인 어감일 것이다. 나만 해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국회 출입할 당시 한 유력매체 출신 국회의원은 2~3일에 한번 꼴로 내게 전화를 했다. "요새 우리 당의 이슈는 뭐야? 최근에 누구랑 밥먹었어? 거기서 좀 무슨 얘기가 나왔어?" 아마도 의원이 되기 전부터 나와 친분이 있어서 물어본 거겠지만 좀 불편했다. 기자와 의원 간의 관계가 아니라 회사 선배와 후배같은 느낌이었다.
그 의원은 내게 최근 정당팀 막내급 기자들을 자주 지적했다. 그들의 행태를 보아하니 기자같지 않고 너무 열심히 하지 않는다며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니 어쩜, 기사를 그렇게 쓰고 취재를 그렇게 한대. 우리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야.." 내 앞에서만 여과없이 꼰대력을 발산하는 그분을 바라보며 내 목젖까지 차오른 그 말이 바로 '선배, 기자 물 언제 빼실꺼에요?' 였다.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사례로 유추해 보건데 '기자 물'에는 이런 키워드가 포함될 듯 싶다. 까칠함, 가르치려 함, 아는체 함, 잘난척 함, 인생 선배 인척 함, 좀 재수가 없음, 친절하지 못함, 남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음, 자기 얘기만 함, 자신이 많이 안다고 과신함, 작금의 현실을 개탄함, 언론에 대해 아는 척을 함, 최근 기자들의 나태함을 지적함, 자신의 학식을 자랑함, 자신의 경험을 과대포장함, 글쓰기에 과도한 자부심을 가짐, 꼰대력이 상당함 등등. 적고 나니 정말 다 부정적인 이야기다. 아니 거의 인간 말종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종종 기업이나 공무원 분들로부터 기자 출신 직원에 대한 호평을 듣고 했다. 뭐 내가 기자라서 좋게 얘기해준 측면도 있겠지만. 우선 일처리가 빠르다고 했다. 일반 직원이 일주일 걸릴 일을 하루만에 다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아마 언론계 특유의 마감 압박과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진 이들이 주어진 업무를 속도내서 처리하는 것 같다. 또 사업이나 행사를 기획할때 아이디어가 많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어느정도 가능케 만든다고 했다.
이런 업무적 강점에도 불구하고 '기자 물'이 여전히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우선 언론사와 일반 기업은 너무 다르다. 언론사는 가끔 동아리 같다. 위계서열이 없는 척 하면서 매우 강한 조직이지만, 또 어떨때는 후배가 선배에게 대들기도 한다. 후배가 선배를 지적하는 대자보도 회사 한가운데 써서 붙이고, 갑자기 잠수를 타기도 한다. 일반 기업이었다면 용납되지 않을 일도 언론사에선 통용된다. 맨날 회사로 가지 않고 출입처 기자실이나 근처 까페로 나가니 일과 시간 운용도 좀 자유로운 편이다. 그러니 기자로서 언론사에서 일할 때와 기업으로 옮겼을 때는 행동양식과 마인드를 좀 바꿔야 한다. 하지만 수십년 언론사에서 일하다가 전직한 경우 그 작업이 쉽지는 않다. 사실 매우 어려울 것 같다.
많은 경우 기자 물 언급은 기자 출신 홍보맨이나 기업 관계자가 어리고 연차가 낮은 현직기자를 응대하는 가운데 발발한다. 물론 기자를 떠받들고, 대접해 달라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인 예의를 갖춰야 한다. 그런데 첫 만남부터 반말을 한다든지, 니네 회사에 너희 선배 누구와 친하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친근함의 표시이기도 하겠으나 MZ 세대 기자들에게 반감을 살 수 밖에 없다.
나도 과거 모 철강회사 홍보팀 직원과 통화하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우리 회사 출신이었으나 입사 전에 퇴사했기 때문에 난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박세환? 나 누구누구인데 식사나 한번하지"라고 했다. 누구냐고 묻자 "니네 선배"라고 했다. 어찌저찌 점심을 했는데 계속 반말에 비아냥대는 식이었다. 그 이후 다신 그 사람은 본적이 없다. 선배 같지도 않은 이가 아무런 예의도 존중도 없이 밀고 들어오면 똑같이 대할 수 밖에 없다. 꼬질꼬질한 기자 물이 얼마나 꼴불견인지 몸소 체험했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난 기자 출신이면서 전혀 기자 출신인 티가 나지 않는 기업이나 정계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참 존경스럽다. 어린 기자의 객기어린 질문이나 후배 기자의 훈수 등이 같잖고 민망할 텐데도 그걸 다 존중하고 들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기자 물을 빼지 못한 이들에게 가끔 묻고 싶은게 있었다. 그럴 꺼면 계속 기자를 하시지, 왜 옮기셨느냐? 다양한 답이 있겠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서, 입신양명의 꿈이 있어서 등등.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기자라는 직업을 내려놨다면 라떼 드립 등은 좀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또 생각해보면 내 미래의 모습일수도 있겠다는 상념도 스쳐간다. 죽을때까지 기자를 할 수도 없고, 기대여명 100세 시대에 언젠가는 새 직업을 찾고 해야 할 터인데. 그 이직이나 전직 과정도 지난할 터이지만, 과연 내가 새로운 직업을 맞았어도 언론사에서 일한 내 젊은 시절을 싹 지우고, 기자 물을 빼고 일할 수 있을지.. 영혼을 갈아넣은 그 잊지 못할 경험을 일단 마음 속에 묻어두고 겸손하고 담백하게 업무를 보고 할 수 있을지.. 그런 성숙한 삶의 자세를 배우자고 다짐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