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_135. 거울 항해

순항훈련 펜탈로지의 대단원.

by 서용훈
아 죽음이여, 늙은 선장이여, 시간이 됐습니다! 닻을 올리시오!
이 세상은 이제 지겨워요, 죽음이여! 채비를 하소서!
- 샤를 보들레르 「Le Voyage」


필리핀 마닐라. 그리고 1월 1일 0시. 캄캄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일제히 불새들이 날아오른다. 새해 벽두부터 온 천지가 불꽃으로 물들더니, 커다란 도시 전체가 흡사 꽃밭이다.


시야가 탁 트인 함교의 지붕 격인 상갑판에 올랐다. 미리부터 조명은 다 꺼두고 시간을 죽였더랬다. 준비해 둔 행사용 와인잔에 포도주스를 따라 그럴듯하게 분위기도 붙잡아보았다. 그리고, 필리핀 장교의 조언에 따라,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우리 필리핀 사람들은 1년 내내 오늘 밤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아요.”


사진에는 장엄함이 안 보이네...
움직여보라!


도심 상공에서 밝게 쏟아져 오르내리는 불빛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신과 거래를 나누는 인간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래된 한 해를 힘껏 쏘아 올린데 대한 화답으로 하늘이 밝은 시간들을 내려주는 것 같달까?


은근슬쩍 나도 청구서를 내밀어보았다.

‘모쪼록, 모레 아침 고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항해가 순탄하기를...’




날이 밝아, 운동 삼아 바닷가를 따라 타박타박 뛰는데, 밤 사이 무슨 전쟁이라도 겪은 냥 온 도시가 어수선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별처럼 화려했던 밤은 도시 곳곳에 무수한 흔적들을 남겼다. 아직도 간간히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어디선가는 매캐한 연기도 나는 것만 같다.


어쩌면 몇몇은 신과의 거래에 실패하고서 쓴 맛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을 잠시 하였다.


해변 도로에는 노숙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길거리에서 비박을 하면서 포장마차 같은 간이 설비 위에 사람을 뉘이고 마사지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온화하고 변화가 적은 날씨 탓인지 모르겠으나, 삶에 대한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른한 광경에 잠깐 동안 어리둥절해졌다.

간밤에 호기롭게 신과의 격렬한 거래를 하던 사람들은 그럼 누구란 말인가?



“다행히도 올해는 사망자는 없네요. 아직까지는 중상 일곱에...”

환송 오찬장에서 만난 필리핀 장교가 전해준 따끈한 현지 소식이었다. 아침운동 길에 했던 망상대로, 누군가는 거래에 호되게 실패해서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어찌 됐든, 이만하면 선방이라는 그의 반응에 미루어 짐작하건대, 여기 사람들에게 있어서 연말연시 불꽃놀이라는 것은, 큰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에 즐거운 놀잇감으로만 소비되는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결국 사람은, 불나방처럼 화려함에 이끌리어 내 살 타는 줄 모르고 화염에 한 몸 바치게 되는 존재.




양껏 기대에 부풀어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지구촌 어딘가에는 매우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로 펼쳐질 치열한 항해에서 나는, 현자의 돌이라도 거머쥐고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던 듯하다.


맥 풀리는 결론이지만 당연히 그런 것은 없었고,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나는 적잖이 당황해서 공허해하던 중이었다.


정열적이고 유쾌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복판에서 내 동료는 소매치기를 당해 여행자금을 잃고 망연자실해야 했다. 미국 볼티모어는 알고 보니 질이 그다지 좋지 못한 동네여서 절대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줘야 했다.(하지만 실제 내가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따뜻했다.) 문명의 도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집요하고 당당하면서도 거칠게 구걸하는 부랑자들과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는 하급관료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캐나다 헬리팩스에 정착한 한 한인은 내게, 한국이 싫어 캐나다로 왔노라고 너무 담담하게 얘기해 주어 씁쓸함도 느껴보았다.


어디를 가나, 이토록 이중적이고, 자신의 이익에 천착하며, 서로의 이기심에 두려움을 느끼고 탈출을 꿈꾸는 것이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나 존재하고 있었다. 나 역시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에 적잖이 실망감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증조할아버지는 사탕수수밭과 파인애플농장 노예로 팔려왔으나, 한민족의 끈기로 잘 정착하여 조국독립에 동냥이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하는 하와이워싱턴 D.C의 한인회분들을 보며 가슴 뭉클한 동지애를 느꼈다. 미국, 콜롬비아, 영국, 프랑스에서 마주했던, 이름 모를 나라에서 젊음을 희생한 것이 평생의 자랑이라는 참전용사를 마주하면서 세대와 인종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인류애의 숭고함을 경험하였다. 무려 3,000명이 넘는 관광객이 밀어닥칠 때 기꺼이 손발을 자처하던 독일군 초임장교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구촌의 일원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기도 하였다.


어디를 가든, 이토록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만남과 경험들은 종종 반성의 시간을 소환해 내었다. 나 역시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끊임없이 되새기도록 만들었다.

필리핀 해군의 현재와 미래를 한 자리에서




이렇게 반추하고 보니, 2만 해리를 항해하는 동안 나는 커다란 거울을 짊어지고 마주하며 다니지 않았는가?


기나긴 경험의 시간들이 퍼즐조각을 맞추듯 하나하나 모여 커다란 거울이 되어 어느샌가 나를 비춰내고 있었다. 내 안에 있는 비루함과 사악함과 옹졸함과 무례함과 같은 거친 성정들이 날뛰는 모습들이 비쳤고, 한 켠에 웅크린 숭고함과 고결함과 용감성과 같은 매력적인 양태들이 간간히 빛나 보이기도 하였다.

해군에게 바다는...


지구를 한 바퀴 돌며 보아도, 사람살이는 거기서 거기다. 먹지 못하면 죽고, 싸지 못해도 죽는다. 죽음을 전제한 이 군상은 내적인 욕구를 위해 지독히도 치열하다. 그러나, 때로는 타자의 생존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의외성이 있기에 빛난다.




출항. 이제 꼬박 엿새만 부지런히 달려가면 대단원의 막도 내릴 것이다.


넉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지겹도록 봐 온 풍광이 펼쳐지고, 뱃머리로 바닷물을 가르는 익숙한 배경음들이 사위를 꼬박 메운다.


매일이 같을진대, 오늘따라 유난히 멋지게 보인다. 흩어졌던 구름과 어지러이 출렁이는 대양이 우연히 모여 시시각각 작품들을 찍어낸다. 이런 의외성이 있기에 바다는 늘 새롭다.

새로움이 풍요로운 바다를 보며, 나는 내심, 내 거래만은 유효했으면 하는 바람을 곱씹는다. ⚓️

지옥이건 천국이건 무슨 상관입니까?
모르는 것의 심연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다면.
- 샤를 보들레르 「Le Voyage」
《UW》 오늘도 순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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